기어코 아래층으로 내려온 영신은 어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딸이 아직도 들어올 때의 복장 그대로인 것을 본 어머니 최여사는 딸아이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편하게 눕는다.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우선 쉬거라. 너에게는 문제가 있어요.

결혼이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종이를 구겨버리듯이 할수 있는게
아닌데, 처음부터 네가 우리 말을 안 듣고 첫번째 단추를 잘못 끼워서 자꾸
단추가 잘 못 끼워지는 거야.

알겠어? 그러니 이번 일은 좀 더 신중하게 해야 된다"

영신은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으며 애원한다.

"제발 엄마, 지나간 이야기 그만해요. 이젠 결혼같은 것 안 할 거니까.

왜 그이는 내가 싫다는데도 떨어져주지 않을까?"

모녀는 동시에 속으로 명답에 이르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를 건드리는 것과 같은 걸까?

김회장의 재력이 그녀의 매력보다 훨씬 우월하게 작용한다는, 즉 돈이
만드는 살인적 파워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더욱 그녀는 자기가 보잘 것 없어지는 이 세태나 남자들의 사고가
징그럽도록 환멸스럽다.

젊은 여자의 몸을 탐하면서도 돈을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는 거다.

더러운 인간!

"엄마, 그이가 이혼을 안 해주려고 해.

이미 다른 여자에게 애까지 만들고서도 염치도 없어. 뻔뻔하고 치사해"

"안 해주려고 한다는 것은 아직 너에게 미련이 있다는 뜻도 되지 않니?"

"그래요. 아버지의 재력에 미련이 남아있는 거야.

그 치는 원래 나보고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니까.

그 때도 좋은 남자는 많았는데..."

그녀는 새삼스러운 후회를 한다.

"너는 너에게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사람만을 선택하는 사람이니까.

너에게도 고칠수 없는 여왕병이 있다는 것을 아니?"

"그래요, 엄마. 정말 그렇게 말하고 보니까 그런것 같네.

결국 나도 한참 바보인 여자니까 이렇게 팔자가 사납지.

똑똑치 못한 것 같아"

"아니 다행이구나. 어서 푹 쉬고 내일 생각하자.

내일이면 또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곤 하는게 세상이니까"

"아빠같은 남자는 어디 없을까?"

"있어도 영리한 여자들이 다 차지하고 너에게까지 할당이 되겠니?

하하하하, 세상은 웃으면서 최선의 방법으로 걸어나가야 하는 거란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이때 노크소리가 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