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소리는 윤효상의 것이었다.

"들어오게. 자네 얼굴보기 정말 힘드네. 영신이가 없으니까 얼굴도 안
내밀더니만"

"매일 문안인사는 여쭈웠지 않습니까?"

교육자 아들로 태어나서 인사하는 법 하나는 제대로 배운 윤효상은 장모
장인과 같이 살면서 문안인사만은 하루도 빼지 않고 드렸다.

그러나 "오 잘잤나?" 라든가 "안녕하시네, 그만 출근하게" 라든가 하는
시답잖은 답을 들으며 피곤한 처가살이를 해왔다.

아들이 없는 집이라서 정말 큰 대가를 바라고 끔찍이도 꼬박꼬박
챙겨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비굴하게 살아온 15년이 억울해서라도 그냥 물러설 수가
없다.

"어머니,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힘들게 할 말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처가살이가 힘들면 나가서 둘이 살라고 했는데 굳이 여기서 산게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잖은가?"

"한국식으로 효자노릇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담요를 푹 뒤집어쓴 영신은 돌아누우면서 짜증을 부리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이봐 윤서방, 이 애가 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이니 오늘은 이 애를
푹 쉬게 하고 내일 말하면 안 되겠는가?"

최여사는 조용히 사위를 달래서 3층으로 올려보내고 싶은 거다.

그리고 이 집에서는 김치수 회장 이외의 어떤 사람도 책임있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김회장은 조용하게 여자들의 입을 관리해오고 있는 무서운 재벌 총수였다.

그는 자기도 사내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일찍 계산에 넣고 최여사나 영신이 보기에 실수로 남을 기록은 하나도 안
남기고 살아온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그는 아들들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
재벌들의 친족체제 스타일을 속으로 전근대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랭킹 30위의 재벌중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경영합리화를 추구하고
있는 천재적 경영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회사에는 친인척 사장이 한사람도 없다.

그는 아무 특기도 없지만 가장 우아하고 인간적이고 세상을 낙천적으로
살면서도 남자문제에서 만은 실수투성이인 외딸 영신을 보석같이 아끼고
귀여워하고 사랑한다.

그는 단순한 아버지로서가 아니고 영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언어행동의 매력같은 것을 높이 사고 사랑한다.

영신같은 타입의 여자가 있다면 사랑에 빠져봄직도 하다고 할 정도로
영신에게 반해서 살고 있는 부녀간이다.

그런 점은 영신도 그랬고 김회장도 그랬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