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이 지난 93년 느닷없이 임원들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로
불러 모았다.

세계 각국의 내로라 하는 제품이 한자리에 모여 판매되는 초대형 양판점에서
자사 제품을 비롯해 한국의 전자제품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라는 얘기였다.

임원들이 돌아본 양판점들의 진열대에는 앞면에 전시된 한국 제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일은 기본적으로 한국제품의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품질이 뒤져서만은 아니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컨슈머 리포트지 최근호는 일부 한국산 전자제품은
기능면에서는 일본제품과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관의 참신성등 디자인이 전반적으로 쳐지기 때문에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디자인 전문회사의 대표는 우리나라의 디자인 수준에 대해 "한마디로
선진국 제품을 리메이크(remake)하는 단계로 일본에 비하면 한 10년정도
뒤쳐졌다"고 잘라 말한다.

국내 업체가 내놓은 제품 가운데 이미 세계화된 소비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만한 디자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KIDP)의 설문조사 결과 국내 소비자의 60%이상이
디자인이 좋아 외국제품을 구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제품을 산 유럽인들 가운데 "디자인이 좋아서"라고 구매동기를
밝힌 사람은 단 6.5%에 불과했다.

1백억달러를 웃도는 우리나라의 무역수지 적자가 어디서 나오는지 가늠케
해주는 대목이다.

한 나라(혹은 기업)의 디자인 수준은 그 나라 산업의 전반적인 수준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의 산업강국들은 디자인수준 또한 A급이다.

신흥공업국인 대만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은 디자인에 있어서도 역시
B급으로 분류된다.

결국 "보통기술에 의존하다보니 B급의 평범한 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제품디자인 못지 않게 중요한 포장및 시각디자인에 있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디자인 전문회사 사장은 얼마전 중견기업을 방문했을때 경영주가
"왜 포장디자인을 돈들여 하느냐"고 면박을 주더라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아직도 상당수 경영자들은 포장 디자인에 들어가는 비용을 가욋돈
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포장디자인은 제품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는데 아주 중요하다.

한국으로부터 냉장고에 붙여놓고 쓰는 자석 병따개를 수입해 판매하는
미국 업자가 있다.

그는 20여개들이 세트를 한국으로부터 단돈 1달러에 수입해 이를 서너개들이
로 나누고 포장을 잘해서 작은 세트당 7~8달러를 받는다.

포장의 위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전문가들은 산업디자인을 "기술개발에 비해 짧은 기간내에 적은 투자로
상품의 경쟁력을 높일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꼽는다.

기술의 평준화가 많이 이뤄지다보니 디자인에서 제품의 차별화가 결판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산업디자인을 기업경영에 필수적인 전략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부도 일찍이 이를 인식해 지난 85년부터 매년 우수산업디자인(GD) 상품전
을 여는 등 적극적으로 산업디자인진흥정책을 펴고 있다.

< 김용준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