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용 <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

1920년대 후반에 전세계로 확산되었던 대공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책을
제시하여 자본주의체제를 회생케 했던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그의 "일반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한바 있다.

"... 경제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의 아이디어는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사실 세상은 그들의 아이디어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지배되고 있다.

그 어떠한 지성적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현실적인 사람들도
대개는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정신적 노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고 외쳐대는 권좌의 미치광이들도 대개는 수년전에
쓰여진 어느 학자의 글에서 그들의 열정을 길러내는데 불과하다.

나는 아이디어의 점진적 압박에 비하면 기득권층의 권력은 크게
과장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케인스의 이런 진단은 반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구구절절이 맞는 말인 것
같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적 대결이 끝난 지금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나라들은 정치적 및 경제적 통치이념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며, 또 모든
집권당과 야당사이에는 뚜렷한 이념적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보편적이다.

특히 같은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보수사상과 진보사상의
대결은 항상 정권교체의 핵이 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진보적 성향과 보수당의 보수적 성향이 그렇고,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진보적 성향과 공화당의 보수성, 프랑스나 독일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일본도 자민당의 보수성과 야당의 진보성의 대결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된다.

최근에 대선주자들이 TV토론에 나와 국민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그들의 통치이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의 통치이념이 보수성에 가까우냐, 아니면 진보적이냐에 따라 수많은
정책적 선택이 결정되는데도 그들의 통치노선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쉬운 점이었다.

경제학에서의 보수성과 진보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정부역할을 줄이고 시장경제 원리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진보주의자들은 시장기능의 취약성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보수-진보의 대결은 모든 정책결정에 필연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교통정책 교육정책 산업정책 등 어느 하나라도 뚜렷한 통치이념이 없으면
결정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왕좌왕하게 되고 결국 국력의 낭비만 초래하게
된다.

예를들면 서울시내 대중교통문제중 버스라는 교통수단을 완전히 이익만
추구하는 개인기업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공익성을 중요시하여 시영체제로
바꿀 것인가, 또는 혼합형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통치이념만 뚜렷하면
해답은 명백해 진다.

공익성이 있기는 하지만 시장원리에 맡기겠다하면 수익성이 있는 노선만
버스가 다니도록 하고 수익성이 없는 노선은 자연적으로 없어지게 되며,
그것에 따르는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공익성을 중요시하며 정부역할을 개입시키겠다고 하면, 시영체제를
부분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그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산업정책은 어떻게 되겠는가.

한 대기업이 자동차산업이나 철강산업에 진입하고자 할 때 정부가 적극
개입하겠는가, 아니면 기업의 의사결정에 맡기겠는가.

또 대기업에 관한 정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일수록 정치지도자들은 그 입장이 뚜렷해야 한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예측이 가능한 정책을 보고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예비 정치지도자들이 그들의 통치이념을 뚜렷하게
보여줘야 하겠다.

즉 한 사회의 전반적인 정치-경제제도의 장기적인 방향과 조정방법을
포함하는 사회운영에 관한 소프트웨어는 정치지도자들의 굳건한 통치이념을
필요로 한다.

정치지도자들의 이념이 뚜렷해야만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예측이 가능한 사회가 된다.

영국의 대처 전총리는 그녀의 뚜렷한 통치이념에 근거하여 단기적으로
고통이 따르는 것을 감수한 결과 영국은 다시 쇠퇴하는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또 뉴질랜드도 그들의 과감한 경제개혁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굳건한 통치이념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세제개혁과 정부
공무원을 50%나 감축하는 등의 개혁을 할 수 있었다.

우리사회가 당면한 산적한 문제들은 논쟁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정치지도자들의 통치이념에 의해 해결책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이
대다수의 국민들에 의해 수용되기 위해서는 예비 정치지도자들이 먼저
그들의 통치이념을 제시하고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할 것같다.

우리는 이제 절대빈곤에서 탈출하였고 OECD에도 가입하였다.

이제는 막연한 평등사상이나 부에 관한 증오나 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지도자들의 통치이념을 보고
선거에 임하고 일단 일정한 통치이념에 근거한 정치체제가 형성되면 그
체제의 정책노선을 수용하는 것이 성숙된 민주사회로 가는 길이라 믿는다.

캐인스가 1930년대 초에 말했듯이 오늘날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너무
기득권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예비 정치지도자들은 그들의 통치이념을 뚜렷이 밝히고 그것에
근거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제시하여 유권자들의 판단을 받아야 할 시기가
왔다.

그래서 정치경제적 기득권보다도 정책대안이 더 중요함을 보여줘야 하겠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