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은행이 기아그룹 18개 계열사에 대해 부도방지협약 신청을 내게된
배경은 기아그룹에 대한 더이상의 자금지원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다.

지난달이후 일시대명목으로 8백억원이상을 지원해 줬음에도 불구, 제2금융권
으로부터 교환회부되는 어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또 한보그룹에 대한 악몽도 제일은행의 조기결단을 부추긴 요인이 됐다.

제일은행은 한보철강에 대한 추가여신의 제공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신중단결정을 늦게 내리는 바람에 거액의 부실여신을 떠안고
두명의 은행장이 구속되는 사태를 맞았던 경험을 갖고 있다.

한보사태이후 제일은행의 경영을 맡은 유시열 행장입장에서도 기존의 부실
여신을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기아그룹에 대한 제2금융권의 무차별적인 어음교환이 시작된 지난
5월이후 제일은행 여신실무진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평균 1천5백억여원 안팎으로 돌아오는 어음결제요구에 종금사를 상대로
밤늦게까지 결제연장을 요구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일시대명목으로 8백억원이상의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기아자동차 인수합병을 둘러싼 악성루머도 은행실무진들을
그로기상태로 몰아넣었다.

지난달 30일엔 3천억원이 넘는 어음이 교환에 회부돼 제일은행이
2백50억여원의 긴급자금을 대줘야 했다.

그러나 종금사들이 어음결제를 연장해 주면서도 다음결제기간을 대부분
사흘안팎으로 정해 시간이 갈수록 교환규모는 불어났다.

이 과정에서 지난 14일엔 하루기준으로 최대규모인 4천억여원이 제일은행에
돌아왔다.

기아에 대한 자금지원이 한계에 봉착한 순간이었다.

유행장은 마침내 이날 기아그룹의 김선홍 회장과 단독면담을 통해 "오늘
교환에 회부될 4천억원을 막지못하면 내일 부도방지협약을 신청할 수 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리고 한일 조흥 상업 신한등 다른 채권은행들에도 이같은 방침을 통보
했다.

그러나 여력이 없던 기아그룹으로서는 결국 1백억원을 막지못해 1차부도를
냈고 15일 부도방지협약신청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제일은행의 이같은 결정은 다른 대기업들에도 상당한 경각심을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여신이 많은 대기업이라고 해서 은행권이 언제까지나 지원을 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조일훈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