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응 < 금융연수원 부원장 >

"사기"를 처음 읽은 것은 20여년전의 일이지만 그때 받은 감명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뜨거운 것이었다.

그때 느낀 감동은 차라리 경외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이러한 경외감은 그후 구약성경을 읽게 되었을 때
특히 "열왕기"와 "역대"를 읽을 때에 비로소 다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문장이 단순하고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유명한 철학서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경외감을 느끼게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지고의 선으로 이를 권면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사기"는 충성심 의리 등과 같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자기 이상을 향해 인생을 진지하게 살다간 위대한 인간상을 기록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스스로가 그러한 인생의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기"를 쓰기 위해서 그는 어려서부터 중국 전역을 여행하는 고통을
감수했고 관직에 들어가서는 어떤 장군의 처벌문제와 관련돼 당시로서는
죽는 것보다 더 불명예스럽다고 생각되었던 궁형의 처벌까지 달게 받았다.

사형과 궁형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는 목적
하나를 위해서 죽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삶을 택했던 것이다.

"사기"가 요즈음과 같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더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사마천의 이러한 고뇌에 찬 노력이 높이 평가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9룡이니, 7룡이니 해서 대권을 향한 주자들의 혼탁한 경쟁상황과 언제
회생할 줄 모르는 경기침체 등으로 앞날이 불투명한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
지도급 인사들에게 "사기"를 다시 한번 읽기를 권하는 것은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의 유장한 역사는 민초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틀림없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제대로 장식하느냐, 못하느냐는 어느 정도 지도층인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