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그룹에 대한 부도유예 발표가 나온 15일 오후 과천 통산부에는 앤드류
카드 미국자동차제조협회(AAMA)회장 일행이 들이닥쳐 한국시장을 대폭 개방
하라고 닥달했다.

한국자동차산업의 내우외환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하루였다.

이날 미국업자들은 "한국자동차시장의 수입차점유율이 1%미만이라는 것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인 한국의 위상에 비추어 일본보다 더
폐쇄적이다"면서 시장을 더 열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빨리 마련하라고
욱박지르듯이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펴고 돌아갔다.

미국업자들이 과천에 오기 직전 외신은 "방한중인 미국자동차업자들이
출국전에 미 행정부에 한국시장추가개방을 위해 슈퍼 301조를 적용하라고
촉구했었다"고 전했다.

미국정부는 이에 화답하듯 내달에 정부간자동차통상협상을 열자고 통산부에
요구해 왔다.

업계와 정부가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서로 알아서 손발을 척척
맞춰 나가는 미국식 민관공조체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즈음 자동차뿐만아니라 경제 현안을 놓고 우리정부와 재계의 티격태격을
지켜봐온 터라 미국업계와 행정부의 기민하고 조직적인 움직임은 부러울
정도였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측 당사자들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 뚜렷한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는 "정책적으로 할수있는 것은 없다"는 식이다.

그룹비서실 조직까지 손보겠다고 나서던 "시장개입주의자"들이 골치아픈
문제만 터지만 어느새"시장경제주의자"로 돌변한다.

업계도 구조조정문제를 둘러싼 시각차이에서 보듯이 스스로 나아갈 방향과
미래비전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식이면 기아의 장래도 미국측 합작파트너인 포드가 뒷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태이 벌어질런지도 모른다.

기아사태에 겹친 시장개방문제는 글로벌경제시대 우리의 역량을 테스트하는
시금석처럼 보인다.

<이동우 산업1부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