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한 공포물이나 전율 만점의 스릴러도 좋지만 그보다 정통멜로물에 흠뻑
취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공포나 멜로 모두 흥미없다면 성과 관련된 소재를 코믹하고 경쾌하게 풀면서
약간의 에로틱한 분위기도 느끼게 해주는 영화가 어떨까.
거기에 일상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하고 예리하게 꼬집어주는
내용이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을까.
섹스코미디를 표방한 영화 2편이 비디오로 나왔다.
"하몽하몽"의 주인공 아비에르 바르뎀 주연의 스페인영화 "보카보카"와
신인 이경민 감독의 데뷔작 "오디션"이 그것.
스페인영화라면 우선 "하이힐"(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강렬한 색채감각
과 "하몽하몽"(비가스 루나)의 기상천외한 유머와 감각적인 에로티시즘이
생각난다.
마뉴엘 고메즈 페레이라 감독의 "보카보카"는 폰섹스, 동성애, 돈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 등 무거운 소재를 스페인 특유의 색채를 유지하며 프랑스코미디
의 어수선함과 할리우드의 리듬감으로 적절히 버무린다.
"보카보카"는 "입에서 입으로"라는 뜻의 스페인어로 폰섹스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극장안내원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객석 뒷자리에서 영화를 보며
자란 빅터의 꿈은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끄는 스타가 되는 것.
하지만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지고 배우의 길은 멀기만하다.
빅터는 매니저인 안젤라의 도움으로 전형적인 스페인남자 역을 찾는 미국
영화사에서 카메라테스트를 받을 기회를 잡는다.
오디션을 받는 날까지 견딜 돈이 없는 빅터는 핫라인이란 폰섹스회사에
들어간다.
동성애자인 빌과 그의 아내 아만다를 동시에 고객으로 잡은 빅터.
아만다는 양육권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처지.
아만다를 사랑하게 된 빅터는 이혼을 돕기 위해 빌을 유혹한다.
두 사람의 동성애장면을 사진에 담아 빌에게 압력을 가할 계획을 세운 것.
하지만 여기엔 돈을 노린 아만다의 살인음모가 숨겨져 있다.
줄거리는 자칫 마음 졸이는 스릴러를 연상시키지만 화면은 여전히 경쾌하게
펼쳐지고 무거워지지 않는다.
빅터는 극전체의 분위기를 흐리지 않을 만큼 가끔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감독은 살벌한 세상이야기를 스페인식의 성적 환상과 짖굿은 농담을 섞어
유쾌한 섹스코미디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빅터역를 맡아 시원시원하고 열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바르뎀은 언제 봐도
활력이 넘친다.
"오디션"은 CF모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장을 하는 남자의 해프닝을
그린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투씨"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하지만 영화는 더없이
가볍다.
성에 관한 자극적인 소재로 관객의 관심을 끌고 웃기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영화에는 음담패설 가슴확대술 남성정력제 속옷패션쇼 여장남자 등 성에
관한 갖가지 이야깃거리가 가득하고 고만고만한 베드신도 잦다.
여기에 조연 최종원 주용만이 웃음제조기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너무 빈약하다.
촉망받는 컴퓨터프로그래머인 남자가 광고모델이 되려 여장을 하고 이 과정
에서 만난 동료에게 진실한 사랑을 발견한다는 뻔한 줄거리는 우연과 비약
에만 기대어 전개된다.
결정적인 결함은 분장.
누가 봐도 여장남자라는게 뻔한데 매력적인 여성으로 통하는 극의 내용은
정말 코미디다.
신인 임지헌의 연기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작품성은 말할 것도 없고 상품성에서도 함량미달이지만 무더운 여름밤의
청량제 역할 정도는 해낼 법하다.
<송태형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