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앙은행의 독립문제가 세간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마치 중앙은행의 독립여부가 금융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양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당사자들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말미암아 극적인 요소까지 갖추고 있어
더욱 그렇다.

중앙은행의 독립문제가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간의 밥그릇 싸움처럼
비쳐지고 있고 또 이를 완전히 부인하기도 어려운 실정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중앙은행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중앙은행의 독립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앙은행이 행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통화정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화폐의 중립성이라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화폐의 중립성이란 통화량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통화증발에 의한 단기적인 경기부양이 반복될 경우
만성적인 인플레가 야기되고 장기적으로는 실물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경제를 단기적인 정치적 고려가 아니라 장기적 안정의 관점에서
운용하기 위하여는 중앙은행이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만으로는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첫째 화폐가 중립적이라면 누가 통화정책의 주체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왜
중요한지 의문이다.

화폐가 과연 중립적이라면 통화정책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정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통화정책이란 어떻게 누가 정하든간에 단순히 통화증가율만
정하고(증가든 감소든) 그에 맞추어 통화량을 기계적으로 일정한 속도로
변동시키기만 하면 된다.

둘째 반대로 화폐가 중립적이 아니라면 왜 중앙은행이 반드시 통화정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리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화폐가 중립적이 아니라면 실물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통화정책의
주체선정은 어느 기관이 국가경제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화폐중립성에 대한 포스트 케인지언학파의 이론적 반론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신고전파이론이 화폐의 존재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반론으로 시작하는 이 학파의 주장은 화폐가 단순한 교환수단이 아니라 부의
축적 수단이자 실물경제활동의 목표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통화의 적절한 공급은 기업의 생산활동을 촉진하여 실물경제의
성장을 원활히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의 목표가 부의 축적임을 감안할 때 실물생산 활동만이
아니라 금융행위도 부의 축적 수단임을 지적하고 통화공급이 부족하여
이자율이 높아지면 기업은 금융행위에 치중하기 때문에 실물생산활동이
위축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통화나 경제활동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포스트 케인지언학파
의 주장은 당연히 화폐의 중립성을 주장하는 신고전파에 의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고전파 이론이 전통적 통화정책서클을 계속하여 풍미하는한 중앙은행의
독립여부와는 상관없이 실물부문과 유리된 통화정책이 지속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포스트 케인지언학파의 주장이 옳은지는 좀 더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통화와 실물경제활동간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현행 통화정책기조도 차제에 다시 한번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통화위원회가 진정
책임있는 통화정책 결정기구가 되어야 한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정치적 고려나 타성적
인사관행에 의하여 구성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어느 대학교수라는 이유만으로, 또 이번에는 어느 차례라는 이유만
으로 위원에 임명되어서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없다.

경제에 대한 일반적 식견은 물론이려니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철학과
신봉하는 학설까지도 감안하여 신중하고 균형감있게 위원을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정된 위원들이 외부압력을 받지 않고 양식에 따라 합리적
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정책수단으로서의 재정정책도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재정정책의 신축성 확보, 국채시장의 육성 등을 통해서 재정정책이
제기능을 할 수 있어야만 통화정책이 재정정책과 분리되어 독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권한다툼처럼 보이는 겉도는 논쟁은 그만 두고 중앙은행의 독립이 왜
필요한지 재차 논거를 냉정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통화와 실물경제와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기초로 중앙은행이 해야 되는 역할이 무엇이며 그
역할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가도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야
한다.

중앙은행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독립된 중앙은행이 우리경제를 책임있게
효율적으로 운영토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