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나쁜영화'를 만드는 사회..박성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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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몹시 괴로웠다.
아무데도 출마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공화당 후보지명과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나는 외교정책에 대해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가치들로 돌아갈 필요에 대해서도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종화합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군인으로 일하는 동안 다뤄본 적이 없는 경제 교육 보건 개혁
등 수십가지 국내문제에 관해 단호하고 정열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가장 꺼려했던 점은 선거운동을 지원할 막대한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해야 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만 해도 싫었다.
결국 대답은 <아니야>였다"
최근 국내에서도 출간된 "콜린 파월 자서전"의 일부다.
파월의 이같은 고백이 유독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느껴진 것은 한보와
김현철사건, 진로 대농 기아 그룹의 부도유예, 대선후보 경선소동에 이은
후보아들의 병역특혜 시비, "빨간 마후라"사건에 이르는 갖가지 우울하고
끔찍한 일들로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읽은 때문인 듯하다.
지난해말 이후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부문에서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속에서 도덕과 윤리, 책임감 신뢰 명예 수치심
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일이천만원을 구하지 못해 자살하는 중소기업 사장이 속출하는 마당에
몇억 몇십억원을 대가성 없는 떡값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대통령후보로 나선
사람이 건장한 아들 둘 모두를 군대에 보내지 않고도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는 말만 되풀이한다.
대기업그룹의 부도유예 사태가 계속되고 국내 금융권에 대한 해외신인도가
하향곡선을 긋는데도 책임지겠다거나 대안을 내놓는 데가 없다.
중고생들이 포르노비디오를 찍었다고 삼삼오오 모여 개탄하면서도 은근
슬쩍 "그거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최근 논란 끝에 극장에 걸린 "나쁜 영화"는 우리 사회의 그같은 어둠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독은 현실고발이라는 전제 아래 청소년 선도위원이 여중고생을 폭행하고
멀쩡한 중년신사가 딸같은 접대부에게 변태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을
실제로 그같은 일을 당하고 행한 비행청소년과 부랑자들로 하여금
실연시켰다고 한다.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는 이같은 일들은 그러나 들여다보면 맥을 같이한다.
좀처럼 끊어질 것같지 않은 정경유착의 끈끈하고도 단단한 고리와
거기에서 비롯된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이상한 논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에서 비롯된 패거리문화와 그 결속을 위해 존재하는
향락문화가 공범이다.
이 모든 일들이 얽히고 설켜 "무원칙의 천국"을 만들었고 그 결과 원칙을
지키면 손해라는 공식이 생겨났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라고
주장한다.
촌지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해당자들은 자신을 "애꿎은 희생양"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몇억원을 떡값으로 받고 수천억 수조원의 은행돈을 빌려다 갚지
않으면서 잘못했다는 얘기는 커녕 "억울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
속에서 상품권 한두장 립스틱 몇개 받은 것을 뉘우치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부족함과 궁핍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갖고
누리기 위해 염치따윈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편으로 우리
주변엔 아직까지 일생동안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묵묵히 영혼을 바쳐 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는 더이상 "나쁜 영화"가 만들어지는 사회에 살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원칙을 회복하고 근면과 성실이 중요한 덕목으로 회복되도록
다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에서 비롯됐던 물질만능주의에서 이제 도망쳐야 한다.
두리뭉실한 온정주의도 지양해야 한다.
따지는 사람은 곧 불편한 사람으로 여기는 풍조도 버려야 한다.
우매하고 천박하고 악한 것에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무임승차자가 없는 사회, 건강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득권부터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내것을 포기할 때의 고통을 감수할 때 희망은 보다 큰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설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일자).
아무데도 출마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공화당 후보지명과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나는 외교정책에 대해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가치들로 돌아갈 필요에 대해서도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종화합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군인으로 일하는 동안 다뤄본 적이 없는 경제 교육 보건 개혁
등 수십가지 국내문제에 관해 단호하고 정열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가장 꺼려했던 점은 선거운동을 지원할 막대한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해야 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만 해도 싫었다.
결국 대답은 <아니야>였다"
최근 국내에서도 출간된 "콜린 파월 자서전"의 일부다.
파월의 이같은 고백이 유독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느껴진 것은 한보와
김현철사건, 진로 대농 기아 그룹의 부도유예, 대선후보 경선소동에 이은
후보아들의 병역특혜 시비, "빨간 마후라"사건에 이르는 갖가지 우울하고
끔찍한 일들로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읽은 때문인 듯하다.
지난해말 이후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부문에서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속에서 도덕과 윤리, 책임감 신뢰 명예 수치심
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일이천만원을 구하지 못해 자살하는 중소기업 사장이 속출하는 마당에
몇억 몇십억원을 대가성 없는 떡값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대통령후보로 나선
사람이 건장한 아들 둘 모두를 군대에 보내지 않고도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는 말만 되풀이한다.
대기업그룹의 부도유예 사태가 계속되고 국내 금융권에 대한 해외신인도가
하향곡선을 긋는데도 책임지겠다거나 대안을 내놓는 데가 없다.
중고생들이 포르노비디오를 찍었다고 삼삼오오 모여 개탄하면서도 은근
슬쩍 "그거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최근 논란 끝에 극장에 걸린 "나쁜 영화"는 우리 사회의 그같은 어둠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독은 현실고발이라는 전제 아래 청소년 선도위원이 여중고생을 폭행하고
멀쩡한 중년신사가 딸같은 접대부에게 변태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을
실제로 그같은 일을 당하고 행한 비행청소년과 부랑자들로 하여금
실연시켰다고 한다.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는 이같은 일들은 그러나 들여다보면 맥을 같이한다.
좀처럼 끊어질 것같지 않은 정경유착의 끈끈하고도 단단한 고리와
거기에서 비롯된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이상한 논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에서 비롯된 패거리문화와 그 결속을 위해 존재하는
향락문화가 공범이다.
이 모든 일들이 얽히고 설켜 "무원칙의 천국"을 만들었고 그 결과 원칙을
지키면 손해라는 공식이 생겨났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라고
주장한다.
촌지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해당자들은 자신을 "애꿎은 희생양"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몇억원을 떡값으로 받고 수천억 수조원의 은행돈을 빌려다 갚지
않으면서 잘못했다는 얘기는 커녕 "억울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
속에서 상품권 한두장 립스틱 몇개 받은 것을 뉘우치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부족함과 궁핍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갖고
누리기 위해 염치따윈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편으로 우리
주변엔 아직까지 일생동안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묵묵히 영혼을 바쳐 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는 더이상 "나쁜 영화"가 만들어지는 사회에 살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원칙을 회복하고 근면과 성실이 중요한 덕목으로 회복되도록
다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에서 비롯됐던 물질만능주의에서 이제 도망쳐야 한다.
두리뭉실한 온정주의도 지양해야 한다.
따지는 사람은 곧 불편한 사람으로 여기는 풍조도 버려야 한다.
우매하고 천박하고 악한 것에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무임승차자가 없는 사회, 건강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득권부터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내것을 포기할 때의 고통을 감수할 때 희망은 보다 큰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설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