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정신을 못 차렸어.

한번 망해봐야 해.

더 망해봐야 해"

이는 한보에서부터 기아그룹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대기업
부도사태가 화제가 된 자리에서 나온 어느 중소 사업자의 절규에 가까운
발언이다.

그는 이어 대기업 노조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에 비해 두배나 되는 급여를
받으면서도 툭하면 파업을 일삼으며,대기업 경영자들은 방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경영으로 노조에 힘을 실어준다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일단 부도유예조치로 한숨을 돌린 기아사태의 처리방식을 놓고 그동안
정치권과 재계는 물론 노동계와 일반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거국적이라
할 만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바 있다.

논쟁의 초점은 크게 둘로 나뉘고 있다.

그 하나는 우선 급하니 앰플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환부를 도려내야 몸통 전체가 살아날수 있다는 주장이다.

전자는 기아사태가 국민경제에 몰고올 엄청난 파문과 대외 신용도추락을
막기 위해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반면 후자는 전자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자구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는 기업스스로 살신의 결단이 필수적인 문제라는
주장이다.

제2, 제3의 기아사태가 계속될지도 모르는 형국에서 앰플 주사로
땜질할수 없다는 것이다.

기아사태의 수습방향은 향후 우리나라 기업정책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때문에 해결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기아 살리기" 논쟁의 와중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안이 간과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행태와 관련된 문제이다.

무한경쟁시대에 기업의 생존은 노조의 의식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조의 의식이 합리적이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전략도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아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자구노력이 경제논리에 입각한 합리적
노사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기아가 위기에 처하게된 1차적인 책임은 경영진에 있다고는 하나
기아노조의 "강경성"이 어려운 기업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기아그룹 주력사의 단체협약 내용은 한마디로 경영자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노조의 합의가 없으면 고용조정이 불가능하다.

합의에 친숙하지 않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특성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조합활동이라면 20일이상 무단결근을 해도 징계할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해고나 권고사직도 노사동수로 구성되어 있는 징계위원회(위원장 별도)에서
3분의2이상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이렇듯 구조조정과 변화가 거의 불가능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기아의 단체협약은 여타 동종업체에 비해 그 정도가 심하다.

이래서는 어느 기업이라도 경쟁력있게 살아남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기아 노조는 1천억원 모금운동 등 구사활동에 열의를 다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상기하면 이는
크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기아사태에 대한 처방을 논의하면서 미국 크라이슬러의 회생사례가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크라이슬러가 우리나라와 같은 노사관행 아래서라면 회생할수
있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 없다.

경영권과 관련하여 혹자는 독일식의 근로자 참여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최근 해외, 특히
영국으로 이전하는 기업이 늘고 있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확대로 외국차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오고 있으며,
그들과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개발과 원가절감 외에는 길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자동화의 촉진 등을 포함한 경영혁신이 필수적이며, 여기에
고용조정과 고용유연화의 불가피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국적으로 기아의 회생여부는 노조의 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때문에 노조의 의식전환이 강도있게 요구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기아그룹 사태가 하루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은 냉혹한 경제논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본다.

동시에 개방화 사회속에서 앞으로 취해야 할 미래의 정책노선과 연계되는
면밀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아사태를 계기로 새삼 우리의 의식 인프라가 새롭게 구축될 필요성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경영자는 정직과 내실의 경영혁신을 과감히 단행하고, 근로자는 평등의식
보다는 공평의식이 우선하는 직업윤리를 고양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 정부는 모든 분야에서 기업자율과 근로의욕이 확보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각계의 이러한 노력이 없으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렵고
일시적으로는 모면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해결방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노동계의 어느 지도자는 기아사태를 빌미로 "노조 죽이기" 움직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앞서 얘기한 중소기업가의 "더 망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필자 개인만의 느낌일까.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제2의 "봉고" 신화를 고대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