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컬렉션 가이드] '대작과 소품'..질적판단 우선 안목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우리가 보통 작품의 크기를 크거나 작다고 하는 말처럼 추상적이고
애매한 경우도 드문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의 물리적인 척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보통 성인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그림이나 조각작품이 사람
크기보다 클 때를 대작, 작을 때를 소품으로 구분한다.
캔버스의 경우 1백호(F)의 세로가 1백62cm 내외로 그 이상을 통상
대작이라 부르곤 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라는 것이 지극히 상대적인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은 우리가 경험해 온 공간이 복합적이고 가변적이며 "멀티 (multi)"나
"사이버 (cyber)"차원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는 시점이다.
따라서 작품의 크고 작음의 문제는 이제 공간의 양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며 매체 선택과 그것들의 조합에 달린 문제로 전환되어야할
것이다.
특히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 "큰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도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온 내용이지만 호당가격이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편견에 근거한 것이다.
"대물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컬렉터에게 필수적인
일이다.
크기가 작은 작품이면서도 미술사에 기록될만한 사례들이 국내외에
무수히 많다.
국내 작가들 가운데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같은 작가들은 크기가 작은
작품들을 주로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작품을 작다는 이유만으로 소품이라고 할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크기가 아주 작은 신라시대 토우나 토용이 주는 밀도와 주술적 힘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외국의 경우는 만 레이, 린 차드윅, 헨리 무어, 막스 에른스트,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이 작으면서도 큰 감동을 주는 기념비적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차드윅이 80년대 초 길이 7cm 내외의 작은 작품들로 전시회를
가졌을때 카터 리트클리프는 "단지 크게만 제작한다면 그의 작품이 주는
강렬한 힘과 예민한 감각 등이 감소될 것"이라고 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자신의 작품들이 왜소화되어 가는 40년대말
이와관련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바 있다.
"작품들이 왜소화되어 가는 단계에서 갖는 두려움이 있다.
너무 작기 때문에 칼을 대기만 해도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이다"
이렇듯 깡마르고 왜소한 자코메티의 작품이 로댕의 근육질 인체인
"팡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독특한 미적 경험을 준다는 사실이 바로
"대물 신화"의 허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소품 열기가 일어나 적지 않은 작가들이
소품제작에 참여한 바가 있다.
많은 작가들이 1호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마디씩 하곤 했다.
심지어 원로 작가 K씨는 "작은 그림을 보면 그 작가의 역량이 숨김없이
드러난다"고까지 말했다.
소품은 단순히 큰 작품의 축소판이 아니며 큰 작품의 어느 한 부분은
더욱 아니다.
"3인치 회화"로 불리는 강익중 작품의 성취는 작은 그림의 승리이며
또 그 조합과 연출이 관건이었음을 시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9일자).
애매한 경우도 드문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의 물리적인 척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보통 성인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그림이나 조각작품이 사람
크기보다 클 때를 대작, 작을 때를 소품으로 구분한다.
캔버스의 경우 1백호(F)의 세로가 1백62cm 내외로 그 이상을 통상
대작이라 부르곤 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라는 것이 지극히 상대적인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은 우리가 경험해 온 공간이 복합적이고 가변적이며 "멀티 (multi)"나
"사이버 (cyber)"차원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는 시점이다.
따라서 작품의 크고 작음의 문제는 이제 공간의 양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며 매체 선택과 그것들의 조합에 달린 문제로 전환되어야할
것이다.
특히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 "큰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도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온 내용이지만 호당가격이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편견에 근거한 것이다.
"대물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컬렉터에게 필수적인
일이다.
크기가 작은 작품이면서도 미술사에 기록될만한 사례들이 국내외에
무수히 많다.
국내 작가들 가운데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같은 작가들은 크기가 작은
작품들을 주로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작품을 작다는 이유만으로 소품이라고 할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크기가 아주 작은 신라시대 토우나 토용이 주는 밀도와 주술적 힘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외국의 경우는 만 레이, 린 차드윅, 헨리 무어, 막스 에른스트,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이 작으면서도 큰 감동을 주는 기념비적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차드윅이 80년대 초 길이 7cm 내외의 작은 작품들로 전시회를
가졌을때 카터 리트클리프는 "단지 크게만 제작한다면 그의 작품이 주는
강렬한 힘과 예민한 감각 등이 감소될 것"이라고 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자신의 작품들이 왜소화되어 가는 40년대말
이와관련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바 있다.
"작품들이 왜소화되어 가는 단계에서 갖는 두려움이 있다.
너무 작기 때문에 칼을 대기만 해도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이다"
이렇듯 깡마르고 왜소한 자코메티의 작품이 로댕의 근육질 인체인
"팡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독특한 미적 경험을 준다는 사실이 바로
"대물 신화"의 허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소품 열기가 일어나 적지 않은 작가들이
소품제작에 참여한 바가 있다.
많은 작가들이 1호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마디씩 하곤 했다.
심지어 원로 작가 K씨는 "작은 그림을 보면 그 작가의 역량이 숨김없이
드러난다"고까지 말했다.
소품은 단순히 큰 작품의 축소판이 아니며 큰 작품의 어느 한 부분은
더욱 아니다.
"3인치 회화"로 불리는 강익중 작품의 성취는 작은 그림의 승리이며
또 그 조합과 연출이 관건이었음을 시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