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19세기말 자주적 개혁과 개방에 실패한 우리나라는 국가경쟁력을
상실하여 20세기초 외세의 침입을 당해 나라전체적으로 멸망직전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분단의 비극이라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고통이 반세기가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이제 다시 9백일도 남기지 안은채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자주적 개혁과 개방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1백년전과 동일한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국민이 동참하지 않는 구호뿐인 개혁, 정부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개혁,
이름뿐인 금융자율화와 용두사미 금융개혁, 문어발식 확장과 정부만
쳐다보는 무책임 기업경영, 외세에 밀려 우선순위 뒤바뀐 어쩔수 없는
개혁 등 최근 정치 경제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개혁실패의 혼돈상황의
근본 원인은 따지고 보면 투명성없는 원칙과 실천의지없는 무책임으로
귀결된다.

더욱이 외부환경은 무한경쟁 시대인데 아직도 우리네 경쟁의식은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불공정한 게임 룰을 갖고 있으니
국내경쟁에서 이긴 개인이나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정치인들에 의해 그동안 세계화구현, 시장경제확립, 자유경제추구,
금융자율화실천 등 온갖 미사여구를 많이 들어왔으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1인당국민소득 1만5천달러가 넘는 나라중에서 교육정책이 우리처럼
천편일률적으로 하향평준화하고 있는 세계화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한 선진국중에서 최고대학 엘리트들의 90%이상이 막강한
공무원만 되려고 대학전체에 고시열풍이 부는 나라는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 금융세미나다 뭐다 하면서 금융자율화를 외쳐대지만 실제로
명문대학 엘리트들이 입사후 이삼십년이 지나 전문가가 되어도 감독관이나
규제자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금융선진국은 결코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다시 한번 슬프게 한다.

우리는 좋아하는 국내운동경기를 관전할 때 운동선수들(플레이어)의
화려한 기술과 팀워크와 작전을 보러 가는 것이지 심판(정치인과 규제자)의
기상천외한 발상이나 신출귀몰한 규칙변경을 관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이나 규제자들은 플레이어가 아니며, 그들은 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지도록 게임 룰 적용여부에만 관심을 가져야 되며, 공정한 게임이
끝나고 나면 조용히 여론의 뒤쪽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경제 사회의 게임은 어떠한가.

정치인들과 규제자들은 게임의 심판관임에도 불구하고 관중동원에 열광한
나머지 불투명한 원칙을 마구잡이로 적용하고, 페널티 킥을 주는 경우도
팀에 따라 달라지는 무원칙이 횡행하니 자연히 선수들은 자기실력을 키우는
것보다는 심판에게 잘 보이려고 로비를 하거나 속임술 개발에 더 큰 관심을
갖게되고, 급기야는 심판이 선수들보다 더 잘 뛸수 있다며 자기들이
플레이를 하겠다고 하니 그 게임을 누가 보러 오겠으며, 그로 인한
입장료수입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큰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국내무대에서 1등을 한 개인이나
기업이 국제무대에 나가면 번번이 망신만 당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

우리는 흔히 정부와 시장의 보완적 역할에 관하여 상당수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데,이는 교과서에 나오는 시장실패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산업의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한 리스크 파트너라는 측면에서 개발경제시대에
경험했던 정부의 순기능에 대해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개발경제시대에는 우리에게 엄밀한 의미의 국내시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냉혹한 해외수출시장만 존재하였는데, 이때 정부는 경쟁력있는
플레이어를 양성하기 위하여 가급적 공정하게 룰을 적용하려고 하였으며,
시장개척 등에 따르는 위험을 보장해주는 보험자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시적인 표를 의식하는 정치권이 행정부를 마음대로 조정하며,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어느때라도 게임 룰을 바꿀 뿐아니라 원칙적용자체가
불투명하고 불공정하여 그나마 형성된 시장자체가 대단히 불완전하며,
국내경쟁에서의 1등이 국제경쟁력이 더 낫다는 보장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우리가 요즘같은 혼돈된 상황에서 유일한 청량제라고 일컫는 박찬호
선수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그가 국내무대에서 단지
가능성만 약간 보유한 무명선수였지만 세계최고의 메이저리그에서
당당히 최상의 선수반열에 선 경쟁력을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이제 새로운 천년(Millenium)과 신세기가 시작된다.

1백년전의 오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권과 정부는
정치부문과 공공부문부터 혁신하고, 국내시장에서 투명한 원칙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최소한의 게임룰을 견지하는 조용한, 그러나 엄격한 심판자로서의
자기개혁을 먼저 이루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노벨 경제학자 애로 교수의 "선하고 정직한 독재자(Benevolent
Dictator)"가 기다려지는 때도 없는 것은 필자만의 바람일까.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