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환 <인제대 총장>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교역이 최근 십여년 사이에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84년에 우리가 베트남에 2천4백만달러를 수출했고 96년에는 16억달러를
수출함으로써 12년만에 무려 67배의 신장을 기록했다.

수입에 있어서도 같은 기간에 7백70만달러에서 2억3천만달러로 30배의
신장을 기록했다.

베트남은 중국과 더불어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개방하여
경제성장을 꾀하는 아시아국가로 자본과 기술투자에 있어 관심을 가질만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역사 문화적으로 보아도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우리나라에 한사군이 설치되던 비슷한 시기에 베트남에도 한나라의
점령기지가 설치되었던 역사적 경험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점들이 닮았다.

예를 들면 중국인접국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베트남어의 상당부분이
중국어에서 유래되었다든지, 그들의 사회체제와 인생관에 유교 불교 도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등은 우리와 거의 같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인접국가의 외침을 수없이 받았으면서도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관습을 유지했다든지, 2차대전이후에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분단국이 되었다는 점까지 우리와 일치한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한번도
굴하지 않고 세계 최강대국들과 싸워 독립을 쟁취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베트남은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자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자 45년 9월2일 베트남
독립동맹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단지 프랑스 연합내의 독립주로 여기려 했고
이에 반발한 베트남독립동맹군과 프랑스군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쟁은 54년 프랑스가 이엔비엔푸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마감되었고, 전후에 맺어진 제네바협정은 남북베트남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기 위해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아래 56년 베트남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인도차이나반도가 공산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정부는 남베트남의
수반이었던 고 딘 디엠을 지원하여 총선을 거절했고, 이에따라 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북베트남측과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베트남전쟁이었다.

미군이 한창 많았던 69년에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의 수는 54만명이었다고
한다.

76년7월 베트남은 미국을 패퇴시키고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총 2천억달러나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미국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베트남사람들에게도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집을 잃었다.

농촌은 폭격과 고엽작전에 의해 황폐화되었으며,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농업 상업 공업의 발달이 모두 정지되었다.

전쟁이후 20여년간에 걸쳐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사회적인 안정을
꾀했지만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개방을 새로운 기치로
내세우면서 경제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총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투자를 요청한 바 있다.

우리나라와는 베트남전쟁과정에 우리가 개입한 역사적 사실때문에 한때
불편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과거를 묻지않고 베트남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의 기술과 자본을 유치하려 애쓰고 있는 실정이며 현재 대사급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베트남 투자액이 일본을 넘어 1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양국간에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국가간 교류를 하면서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성만을
따지는 단기적인 안목의 투자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나라 국민의 마음을 여는 노력이 병행될 때
두나라의 우호관계도 좋아지고 장기적으로 보아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