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다가오는 추석이 무서워요. 돈도 돈이지만 사람들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우니까요. 다들 측은한 눈빛으로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을텐데..
이젠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도 지쳤습니다"(기아자동차 C대리)

"아무래도 규모를 줄여야 하지 않겠어요? 작년에 제삿상에 사과 배 3개씩
올려 놨다면 올해에는 하나씩 정도만 놔야 할 것 같아요. 조상님도 이번만은
이해해 주시겠죠"(대농그룹 L과장)

불황이 추석을 앞둔 직장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국내 대부분 기업들이 추석 상여금을
예년보다 대폭 줄였다.

특히 한진 롯데 금호등 8개 기업은 추석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을 계획이며
해태 아남 거평 미원그룹등은 상여금 없이 5만~10만원 상당의 선물만 줄
예정이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추석을 날 수 있는 형편일테니 말이다.

기아 진로 대농 한보 삼미그룹등 극한 상황에 몰린 기업 임직원의 올
추석은 더없이 잔인한 계절이다.

"명절"이 아닌 또 하나의 "스트레스"일 뿐이다.

기아그룹의 경우 일반직 사원들중 상당수가 이번 추석에 귀향을 포기했다.

지난 6월부터 상여금은 물론 휴가비나 각종 수당을 전액 반납키로 한
이들은 8월분 임금까지 지급이 미뤄져 사실상 "가계도 1차 부도처리"된
상태다.

따라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선물 보따리를 사들고 고향을 찾는 것은
일종의 "사치"일 수밖에 없다.

여기다 회사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친지들의 반복되는
걱정 또한 적지 않은 부담이다.

지난 29일부터 시작된 부장 과장급 간부 사원에 대한 정리인사도 이들의
추석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

해고된 직원들의 아픔이야 남아 있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클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모 과장이 이번 인사에서 자리를 비웠는데 "추석때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얘기할 수 있겠느냐"며 한숨을 쉴 때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더군요"(기아자동차판매 P과장).

생산직 근로자의 경우 그래도 대부분 고향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귀향목적은 단순히 추석을 쇠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아자동차 노조관계자는 "지난 29일 추석연휴 기간중 3일간 공장을 쉬기로
결정했으나 근로자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착잡한 것"이라며 "상당수 근로자들
이 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친지들에게 기아차 판매활동을 벌일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재계에서는 "진로 대농 한보 삼미그룹등도 기아와 비슷한 처지"
라며 "이렇게 보면 올 추석 귀경 교통난은 예년에 비해 꽤 해소되지
않겠느냐"는 우스갯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 윤성민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