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약관 23세의 한 청년이 화상을 결심하고 파리에 정착해 화랑을
개점했다.

그 청년이 바로 금세기 초 전설적인 화상이자 예술후원자로 기록되고
있는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 (Daniel-Henry Kahnweiler)이다.

20세기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 만큼 많이 등장하는 이름도 드물 것이다.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경제적 궁핍을 자주 겪었던
피카소, 브라크, 드랭, 블라멩크 같은 화가들에게 경제적 지원은 물론
진실한 친구이자 예술적 상담역까지도 맡았던 그였지만, 국적때문에 자신의
전재산인 소장품들을 압류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한 비운의 화상이다.

유태계 독일인인 칸바일러는 1884년 만하임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칼스루헤 미술관 등을 관람하면서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으며, 스무살이 채 되기도 전에 세잔느와 마티스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본격적으로 화상이 되려는 결심을 하고 파리로 이주하여
비뇽가에 화랑을 설립하였다.

그해 같은 고향의 평론가이자 화상인 빌헬름 우데의 안내로 세살 위인
피카소를 만났으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처음 보게 된다.

그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명작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였다.

이후부터 칸바일러는 피카소의 후견인이자 친구로 지내게 된다.

사업면에서 피카소나 브라크 등의 장래성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전속 개념의 독점적 계약을 맺는다.

이밖에도 당시 새로운 모더니즘 미학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및 비평가들과
교제하면서 유럽 화단에서 주목받는 화상이자 수집가로 이름을 날린다.

특히 그는 화가들과 교우하면서 작가들의 상담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화상 선배격인 앙브롸즈 볼라르와 함께 입체화풍 그림들의 초상화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관계를 입증한다.

그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제작에 있어서도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훗날 문제작인 "한국전의 대학살" (1951)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제작당시부터 파리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고 있을 때,
칸바일러는 "인류애적 동점심을 담은 충격적인 작품"이라고 격려와 옹호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안가 국적문제 때문에 자신의 소장품 모두를 프랑스
정부로부터 압류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적을 가진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독일 국적을 가진 우데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압류당한다.

전후 베르사유 조약은 프랑스 정부가 차압한 재산들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1천5백점에 달하는 칸바일러의 현대미술 소장품들이
1921년부터 열린 수차례의 경매를 통해 매각되고, 결국 그의 컬렉션 전체가
분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부의 처사를 미술사가 장 페리에는 "각종 부당한 처사들로
잔인하게 그를 괴롭히고 있다"고 일갈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소장품을 하나라도 수습하려고 응찰에 나서기도 했던 그의 말은
감동적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위대한 화상을 만든다"

1957년 그의 예술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기리고자 개최된 자이덴버그
갤러리 추모전에서 많은 작가들이 숙연하게 애도했으며, 그 전설적 이름은
지금도 미술사에 회자되고 있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