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은 무시무시한 발언을 해대면서 그녀를 당장 갈겨서 내쫓을 것
같이 성을 낸다.

그녀가 자기의 뒤를 캐고 다닌 것이 너무도 불쾌하고 용서가 안 되었다.

그의 불같은 성미를 본 미아는 남자들은 육체보다 더 무서운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새로운 발견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지옥같은 순간을 피할까 궁리한다.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어머니에게 이르지 마세요.

나는 림영 오빠가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어. 됐어요, 이제 꿈을
깰게요.

이것은 나의 패배가 아니라 남성을 보는 새로운 발견이고 새로운
인생공부라고 치고 돌아갈 거야. 나는 이미 없어졌으니까.

어제까지의 미아는 죽었다.

당신이 정말 원망스러워"

그러면서 미아는 그의 뺨에다 살짝 힘있는 키스를 하고 도망가 버린다.

무안해서 얼굴이 상기된채 글썽한 눈빛으로 지영웅을 한참 노려보다가
달아난다.

그때야 권옥경이 생각난 지코치는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는 가고
없다.

그는 갑자기 허전해져서 미아가 뛰어간 골목길을 내다보며 자조의 미소를
날린다.

웨이터가 오더니 그에게 쪽지를 한장 주고 간다.

"아까 같이온 아줌마가 이걸 전해드리래요"

휘갈겨 쓴 권옥경의 편지는 몹시 그를 즐겁게 했다.

< 지영웅 코치 나는 오늘 지코치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생기발랄한
아가씨라고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그 소녀의 정열적인 태도에 손을 들고 도망치면서 나는 지코치에게
또다시 나타나서 우스운 여자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결심했습니다.

안녕! 고마워요.

허니, 정말 미련을 버리기 힘든 남자야 그대는... >

지영웅은 그 편지를 한번 더 읽었다.

그대는 미련을 버리기 어려운 남자라는 그 말이 그를 흡족하게 한다.

여자를 정신적으로 사랑하면 인생은 이렇게 즐거운 것인가.

그는 영신과 오랜만에 가진 정사로 온몸이 나른해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의 사설금고와 은행의 적금통장들을 정리하는 동안 두번이나
적금을 못 낸 1억원짜리 통장을 들여다보면서도 조금도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이번에는 영신에게 통장을 갖다주고 대신 부어달래야겠다고
어리광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미아가 너무 영악하고 똑똑해서 바보가 된 것은 오히려 자기가
아닌가 자문도 해본다.

아무튼 그는 이제 이 오피스텔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른 데로 가서 영신과 함께 살고 싶다.

권옥경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고 미아가 가끔 찾아와서 귀찮게
굴 수도 있다.

그는 사랑을 찾은 여자와 잃은 여자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