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도 부도가 날 수 있다"

"금융기관의 모든 대외채무를 정부가 보증하겠다"

앞은 전직 경제수석비서관이 한보사태의 와중에서 한 말이고, 뒤는 해외
에서 돈꾸기가 어려워지자 경제부총리가 외국 금융기관에 보낸 편지의
요지이다.

기업인들이나 일반인들이 기억할지 모를 이 말을 다시 들먹이는 건
다름아니다.

최근의 금융시장 불안이 이런 발언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제수석의 발언은 국내용이었다.

정부가 개별기업의 부도에 일일이 간섭할 수도 지원할 수도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내국인만이 아니었다.

외국 금융기관 담당자들도 이 말을 들었을게 틀림없다.

처음엔 혹시나 하던 외국의 뱅커들도 기아자동차까지 부도유예대상으로
몰리자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외국 뱅커들이 자금회수에 나선건 당연한
것이었다.

경제부총리의 보증 운운은 은행의 돈꾸기를 지원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금융기관이 꾼 돈을 못갚게 되면 국민세금으로라도 갚아주겠다는 얘기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후에 국내 금융기관이 해외에서 돈 빌리기가 수월해졌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오히려 국책은행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은행이 10억달러 규모의 글로벌본드 발행을 추진하고 있으나 쉽지
않다는 소식이다.

가산금리를 2배로 올려도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금융시장불안은 진정되기는 커녕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환율과 금리가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주가는 급락하고 있다.

기업들은 여전히 자금을 구하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 다닌다.

경제총수의 얘기는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요즘 사태는 과거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를 연상케 할 정도다.

이를테면 "달러쇼크"인 셈이다.

지난 79년 오일쇼크를 돌이켜보자.

갑작스런 오일 메이저의 감산통보가 오일쇼크의 신호였다.

외국 금융기관의 대출거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시 동자부장관은 중동 산유국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물론 기름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만나기 싫다는 산유국의 관계자를 어렵게 만나 구걸하다시피 한 것이다.

간신히 기름을 구해 최악의 사태는 벗어났으나 국내에선 기름가격이 급등
하고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아마도 국민들은 최근의 금융불안도 오일 쇼크 때처럼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줬으면 하는 것 같다.

경제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대책을 추려보면 정부가 환율안정의지를 확고히
하고 금융기관의 신용도를 높이라는 것 등이다.

그러나 과연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려고 금융 외환시장을 이미 상당수준
개방해놓은 터에 환율안정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는 불가능하게 돼있다.

3백억달러에 가까운 보유외환을 환율방어에만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처럼 소로스를 비난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우리 국민들과 기업들은 정부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사실 정부의 능력이란게 별 것 아니다.

서울의 교통문제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고 대기오염도 그렇다.

교육문제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부도유예협약 대상기업이 된 기아그룹의 처리문제도 부지하세월이다.

더군다나 자기자신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다.

금융개혁안을 둘러싼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의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금융개혁안을 서둘러 매듭짓도록 지시하기보다는 기업들이 불편해하는
금융규제를 서둘러 없애야 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말만 많은 구조조정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업들에 서둘러 추진하라고 할뿐 정작 정부 자신은 시작도 못했다.

따져보면 정부도 부실기업이다.

쓸 돈은 많고 세금은 모자란다.

저생산성 비효율과 낭비가 부실의 주범이다.

이런 정부가 금융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오산이다.

더이상 정부에 달러쇼크를 해결해주도록 기대하지 말자.

기업과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정부가 먼저 살빼기에 나선다면 다행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