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구의 중소기업 이야기] (23) '짜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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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인터내셔널의 정진구사장(46)은 중학교 1학년때 가출했다.
여주중을 다니다 가난을 떨쳐버리려 무작정 상경했다.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동대문시장.이곳에서 그는 미싱보조공으로
취직했다.
13살때의 일이다.
이곳에서 그는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미싱 바늘을 끼고 옷을 기워냈다.
그는 남달리 미싱운전을 빨리 배웠다.
빠르게 숙련공이 된 것은 "모르면 물어보자"는 그의 습관 덕분.
이때부터 그는 물어본 내용들을 스스로 짜집기해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이곳에서 7년쯤 지났을 땐 봉제미싱 업계에선 박사가 됐다.
미싱에 들어가는 왠간한 바늘이나 부품은 직접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71년초 동대문시장을 찾아온 한 대만바이어를 만나면서 미싱바늘을
수출할 기회를 얻었다.
수출수주가 차츰 늘어나자 이번엔 직접 미싱을 수출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무역절차에 대해 거의 모르는 그로서는 대책이 없었다.
고심끝에 그는 무역회사에 취직,업무를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중학 중퇴인 그가 무역회사에 들어가긴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그는 신성실업이란 섬유수출업체의 운전기사로 취직해 무역영어를
배우고 실무도 익혔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70년대말 국내기업 가운데선 미싱을 전세계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사람으로 떠올랐다.
수출에 자신이 붙자 의욕이 더 부풀어올랐다.
이번엔 해외투자에 눈을 돌렸다.
91년 업계에서 최초로 베트남 호치민시에 봉제공장을 세웠다.
그는 이곳에다 거의 30년 가까이 쌓아온 미싱봉제 노하우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이곳 종업원들은 손끝이 따라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클레임을 당하게 됐다.
이것이 발단이 돼 자금난을 심하게 겪게 되자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30년간 쌓아온 공든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것.
빈털털이가 된 그는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했다.
동대문시장의 봉제공이 된 심정으로 봉제미싱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이제 미싱이란 기계가 옛날처럼 손발로 돌리는 시대가 아니었다.
모든 공정을 컴퓨터로 재단하고 기워야 했다.
그는 다시 묻는 버릇을 활용했다.
봉제과학연구소및 관계기관 교수 선배 기술자등을 찾아다니며 각분야별
기술을 모았다.
봉제공 출신인 그는 짜집기에 역시 능했다.
대단치 않은 기술이지만 그것을 짜깁기만 하면 세계적인 기술이 됐다.
지난 5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섬유기계전에서 깜작 놀랄 일이 일어났다.
삼정인터내셔널의 부스앞에 수많은 유럽인들이 찾아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들은 삼정이 개발한 "패턴 포머"를 요모조모 살피기에 바빴다.
패턴 포머란 각종 신사복이나 숙녀복의 칼라 포켓플랩등을 곡선형으로
매끈하게 만들 수 있는 기계.
정교한 솜씨를 좋아하는 유럽인들에게 이 제품은 특별히 인기가 있었다.
삼정은 이 전시회를 계기로 스페인 프랑스 폴랜드등 지역 기업들과
에이전트를 맺었다.
패턴 포머도 역시 정사장이 독일 미국 일본등의 기업현장을 찾아가 얻은
노하우를 짜깁기해 개발해낸 것.
정사장이야말로 하찮은 천조각으로도 훌륭한 "밥상보"를 만들어내는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싱대 앞에만 서면 힘이 쏟는다고 한다.
<중소기업 전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5일자).
여주중을 다니다 가난을 떨쳐버리려 무작정 상경했다.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동대문시장.이곳에서 그는 미싱보조공으로
취직했다.
13살때의 일이다.
이곳에서 그는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미싱 바늘을 끼고 옷을 기워냈다.
그는 남달리 미싱운전을 빨리 배웠다.
빠르게 숙련공이 된 것은 "모르면 물어보자"는 그의 습관 덕분.
이때부터 그는 물어본 내용들을 스스로 짜집기해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이곳에서 7년쯤 지났을 땐 봉제미싱 업계에선 박사가 됐다.
미싱에 들어가는 왠간한 바늘이나 부품은 직접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71년초 동대문시장을 찾아온 한 대만바이어를 만나면서 미싱바늘을
수출할 기회를 얻었다.
수출수주가 차츰 늘어나자 이번엔 직접 미싱을 수출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무역절차에 대해 거의 모르는 그로서는 대책이 없었다.
고심끝에 그는 무역회사에 취직,업무를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중학 중퇴인 그가 무역회사에 들어가긴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그는 신성실업이란 섬유수출업체의 운전기사로 취직해 무역영어를
배우고 실무도 익혔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70년대말 국내기업 가운데선 미싱을 전세계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사람으로 떠올랐다.
수출에 자신이 붙자 의욕이 더 부풀어올랐다.
이번엔 해외투자에 눈을 돌렸다.
91년 업계에서 최초로 베트남 호치민시에 봉제공장을 세웠다.
그는 이곳에다 거의 30년 가까이 쌓아온 미싱봉제 노하우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이곳 종업원들은 손끝이 따라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클레임을 당하게 됐다.
이것이 발단이 돼 자금난을 심하게 겪게 되자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30년간 쌓아온 공든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것.
빈털털이가 된 그는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했다.
동대문시장의 봉제공이 된 심정으로 봉제미싱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이제 미싱이란 기계가 옛날처럼 손발로 돌리는 시대가 아니었다.
모든 공정을 컴퓨터로 재단하고 기워야 했다.
그는 다시 묻는 버릇을 활용했다.
봉제과학연구소및 관계기관 교수 선배 기술자등을 찾아다니며 각분야별
기술을 모았다.
봉제공 출신인 그는 짜집기에 역시 능했다.
대단치 않은 기술이지만 그것을 짜깁기만 하면 세계적인 기술이 됐다.
지난 5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섬유기계전에서 깜작 놀랄 일이 일어났다.
삼정인터내셔널의 부스앞에 수많은 유럽인들이 찾아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들은 삼정이 개발한 "패턴 포머"를 요모조모 살피기에 바빴다.
패턴 포머란 각종 신사복이나 숙녀복의 칼라 포켓플랩등을 곡선형으로
매끈하게 만들 수 있는 기계.
정교한 솜씨를 좋아하는 유럽인들에게 이 제품은 특별히 인기가 있었다.
삼정은 이 전시회를 계기로 스페인 프랑스 폴랜드등 지역 기업들과
에이전트를 맺었다.
패턴 포머도 역시 정사장이 독일 미국 일본등의 기업현장을 찾아가 얻은
노하우를 짜깁기해 개발해낸 것.
정사장이야말로 하찮은 천조각으로도 훌륭한 "밥상보"를 만들어내는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싱대 앞에만 서면 힘이 쏟는다고 한다.
<중소기업 전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