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윤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

아름다운 산이 자랑인 스위스의 조용하고 아담한 도시 시옹(Sion)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97티보바가 바이올린 국제콩쿠르가 열렸다.

시옹은 제네바에서 유명한 레만호수를 끼고 로잔을 지나 기차로 2시간정도
가면 되는 곳에 있다.

이 작은 도시에서 하이페츠에 비견되는 명 바이올리니스트 티보 바가
(Tibor Varga)가 주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30년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콩쿠르를 개최하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세계의 유망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앞다퉈 참가하고 있으며
31회째인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경우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재학 시절 이 대회에 참가해 1등상을 받았던
만큼 감회가 새로웠고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이 더없이 영광스러웠다.

시옹은 예전보다 한층 발전된 모습이었으나 더 놀라운 것은 주민들의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성숙한 음악생활이었다.

주민들은 초청받지 않았어도 아침부터 찾아와 젊은 음악인들의 연주를
경청하고 박수를 치면서 격려해 주고 있었다.

정말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런 것이 오늘날 티보바가콩쿠르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었다.

올해 대회(8월9~17일)에는 한국 독일 프랑스 루마니아 네덜란드 헝가리
스위스의 바이올리니스트 7명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예선 본선 결선을 통해
최종 수상자를 결정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한국 일본 이탈리아 등 22개국 53명이 기량을
뽐냈는데 13명이 본선에 진출하고 이중 7명이 결선에서 마지막 실력을 겨뤄
1등은 헝가리, 2등은 루마니아, 3등은 미국, 4등은 한국대표가 차지했다.

콩쿠르 참가자들이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실력을 심사위원과 청중들
앞에서 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펼쳐 보이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특히 심사위원이 보기에는 다소 미숙한데도 자신있고 의젓한 태도로 무대
에서는 외국학생들의 모습은 우리 학생들이 배워야 할 점이었다.

한국 학생들은 음악성이나 연주실력은 국제수준에 전혀 뒤지지 않는데도
무대에서 당당하고 의연하고 자신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쭈삣거리느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것은 콩쿠르에 임하는 기본 마음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외국학생들은 콩쿠르는 어디까지나 음악인생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 끝까지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입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콩쿠르에 참가해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고 다른
사람의 곡 해석과 연주방법을 살펴보는 것도 입상 못지 않게 소중하다고
여긴다.

그에 비해 우리는 콩쿠르에서 탈락하면 마치 자기의 음악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승부에 집착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되고 경직된 연주를 하게 되는
것이다.

콩쿠르 참가는 공부하는 과정이고 발전의 한 단계라고 생각하는 유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또 한가지 우리가 배울 점은 자기 차례만 끝나면 초조하게 결과만 기다리는
우리 학생들과 달리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광경을 끝까지 보면서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또 입상자든 탈락자든 한결같이 심사위원을 찾아와 자신의 장점과
단점, 고쳐야 할 점 등을 자기 스승에게 묻는 것처럼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탈락했을 경우 심사위원들이 뭔가 잘못한게 아닌가 하는 눈초리를 보내거나
얼굴을 못든채 연주장을 떠나는 우리 학생들과 비교할 때 외국학생들의
그같은 자세는 정말 부럽고 감탄스러웠다.

아울러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 자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갖게 했다.

연주방법뿐만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과정을 중시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는데 더욱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물론이다.

티보바가콩쿠르 심사는 내게 앞으로의 교육방향을 생각하게 한 참으로
보람있고 유익한 경험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