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파워&피플) 이선섭 <대우자동차 조립1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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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 조립1부 3과의 이선섭 과장.
올해로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지 꼭 37년째다.
지난 60년 군복부 시절 장기 하사관으로 8년간 자동차를 만지다가
제대후인 68년 신진자동차에 입사했다.
철이 날 무렵부터 지금까지 자동차와 삶을 같이해온 셈이다.
신진자동차에 입사해 그가 맡은 일은 자동차 완성품에서 하자를
찾아내는 일.
향수어린 차인 코로나, 퍼블릭카 등도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
이과장이 처음 맡은 이일은 이후 20년 가까이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자동차 트럭 버스등의 완성차를 면밀히 검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엔진과
보디제작 등의 모든 관련부문에 개선책을 찾는게 그의 일이다.
이과장이 이처럼 이분야의 전문가가 된데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 79년 신진이 미국의 GM사에 흡수됐을 때다.
당시 품질검사시스템으로 불리는 GM의 업무지시서는 모조리 영문으로 돼
있었다.
국내 생산현장과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써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과장은 생산현장에 맞게 점검항목과 테스트방법및 절차를 모두
국산화(?)해버렸다.
이때부터 국산자동차는 수밀테스트를 비롯해 외관 및 품질검사,
주행테스트 등의 체계적인 검사가 가능해졌다.
점검결과는 종합기록부에 기재돼 관련부서에 통보, 비약적인 품질개선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당시 GM의 60개 세계법인중 최하위였던 우리의 품질수준이 15위로
껑충 뛰었다는 사실에서 이과장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능력을 인정받았음은 물론이다.
이과장의 활약은 이뿐만이 아니다.
부산공장의 버스제작과정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했던 방수문제도 2년동안
치밀히 조사해 선진국수준으로 올려놨다.
또 차창이나 문이 제대로 안닫혀 수밀테스트에서 차량이 못쓰게 되는
문제를 보고 풀프루프장치를 개발해 적용하는 성과도 이뤄냈다.
이과장의 이런 한길걷기는 결국 지난 94년 자동차명장으로 선정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과장은 "누구라도 30년만 한우물을 파면 명장이 될 수 있다"며
"끈기가 부족해져 가는 세태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 인천 = 김희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8일자).
올해로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지 꼭 37년째다.
지난 60년 군복부 시절 장기 하사관으로 8년간 자동차를 만지다가
제대후인 68년 신진자동차에 입사했다.
철이 날 무렵부터 지금까지 자동차와 삶을 같이해온 셈이다.
신진자동차에 입사해 그가 맡은 일은 자동차 완성품에서 하자를
찾아내는 일.
향수어린 차인 코로나, 퍼블릭카 등도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
이과장이 처음 맡은 이일은 이후 20년 가까이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자동차 트럭 버스등의 완성차를 면밀히 검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엔진과
보디제작 등의 모든 관련부문에 개선책을 찾는게 그의 일이다.
이과장이 이처럼 이분야의 전문가가 된데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 79년 신진이 미국의 GM사에 흡수됐을 때다.
당시 품질검사시스템으로 불리는 GM의 업무지시서는 모조리 영문으로 돼
있었다.
국내 생산현장과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써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과장은 생산현장에 맞게 점검항목과 테스트방법및 절차를 모두
국산화(?)해버렸다.
이때부터 국산자동차는 수밀테스트를 비롯해 외관 및 품질검사,
주행테스트 등의 체계적인 검사가 가능해졌다.
점검결과는 종합기록부에 기재돼 관련부서에 통보, 비약적인 품질개선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당시 GM의 60개 세계법인중 최하위였던 우리의 품질수준이 15위로
껑충 뛰었다는 사실에서 이과장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능력을 인정받았음은 물론이다.
이과장의 활약은 이뿐만이 아니다.
부산공장의 버스제작과정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했던 방수문제도 2년동안
치밀히 조사해 선진국수준으로 올려놨다.
또 차창이나 문이 제대로 안닫혀 수밀테스트에서 차량이 못쓰게 되는
문제를 보고 풀프루프장치를 개발해 적용하는 성과도 이뤄냈다.
이과장의 이런 한길걷기는 결국 지난 94년 자동차명장으로 선정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과장은 "누구라도 30년만 한우물을 파면 명장이 될 수 있다"며
"끈기가 부족해져 가는 세태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 인천 = 김희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