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석 < 선경인더스트리 울산공장 예정분임조 >

내가 태어난 곳은 인심 좋은 남해안의 항구도시, 여수시 문수동이라는
변두리 한적한 마을로 우리집은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을 돌봐줄 정도로
제법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무렵 불어닥친 지자체 바람에 인근에 유지로 통하던 아버지께서 선거에
몇번 출마하여 당선과 낙선을 하는 그 후유증으로 가세는 급속히 기울어
진학을 포기하고 당장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가구공장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야간학교를 마친뒤 선배의 권유로 말로만 듣던
서울에서 공사판 등을 전전하다 73년 가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울산에
새삶의 터를 잡은 것은 선경합섬에 취직이 계기가 되었고 이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무엇보다도 안정된 직장 생활에 전념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활력소가 되어
주어진 분야에 최고가 되어보자는 평소의 신념을 회사업무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할 즈음 품질분임조 활동이 울산공장에 도입되었다.

나는 전공장을 관리해야 하는 업무의 이점을 살려 분임조활동에 승부를
걸어보기로 목표를 정한후 앞장서서 분임조를 조직하여 제안및 개선활동을
진행하다 보니 중간중간 부딪치는 문제들이 많아 체계적인 기초이론의
필요성을 느끼고 79년10월초 QC기초과정과 통신교육을 이수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79년말에서 80년말까지 1년동안 개선활동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였고 81년에서 83년까지 제안활동과 주제 완결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83년초 주춧돌 분임조의 분임장을 맡은뒤 분임원들간의 유대와 화합,
신뢰와 융화를 다지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우리는 "문제점은 곧 개선점이다"라는 기치아래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뛰기 시작했다.

이같은 우리 분임원들의 열의에 찬 활동은 84년 공장및 전사 QC종합평가
1위라는 결실을 거두었고 타분임조 활동의 활성화에 기폭제가 되어 선의의
경쟁자가 늘어나 최우수 분임조가 되기 위해 불꽃튀는 경쟁을 유도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과정끝에 92년 본격적으로 전개된 우리회사 경영기법의
하나인 SUPEX추구(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는 나를 비롯한 구성원들
의 사고와 행동을 완전히 뒤흔든 또 한번의 계기가 되었다.

93년1월 우리 분임원 9명이 한자리에 모여 "제안활동의 극대화"를 위한
분임회합시 업무와 QM의 효과적인 활동을 역설하면서 나의 제안 목표를
연간 1백건으로 설정하고 목표달성을 다짐해 보였다.

그리고 제안에 관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좌우명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첫째 가능한 높은 목표를 세운다.

둘째 계획보다 실천이 한발 앞서가야 한다.

셋째 오늘 할 일은 내일로 절대 미루지 않는다.

넷째 남과 똑같이 해서는 안된다.

다섯째 모든 현상과 사물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이러한 활동들은 하루 아침의 승부가 아닌 마라톤과 같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원칙을 날마다 되새겼고 1월말에는 30여건의 제안을 제출하여 거의
하루에 1건의 제안을 이룬 셈이다.

그 결과 93년12월15일까지 2백98건의 제안실적을 올리게 되어 당초 목표의
3배를 달성하고 채택률도 79%를 기록하여 93년도 사내 최다제안상을 수상
하게 되었다.

나는 93년 실적에 고무되어 94년도에는 연간 제안 목표를 1천2백건으로
계획하고 이를 달성하기위해 사물의 핵심을 관찰(아이디어 포착)하고
논리적인 근거(제안서 작성기준)를 마련하여 이를 구체화(완성-실시)시켜
나가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임을 알고 제안분야를 품질개선 설비 공정
개선 원가절감으로 크게 구분해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살펴본 결과, 전체
공정 Flow, 설비 파악및 품질관리 업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시급함을
파악하고 제안목표 수준은 "내가 할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 아닌 인간이
할수 있는 최고의 수준"으로 설정하였다.

지난해의 실적이 3백건 정도인데 무려 4배높게 목표를 잡고보니 황당하기도
하였으나 이 시점에서 최대의 적은 나자신의 마음가짐이고 시간과 능력(특히
기억력)이 가장 커다란 장애요인이었다.

연간 1천2백건의 제안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루평균 3건, 월평균
1백건 이상을 달성해야만 가능한 목표였기 때문에 일과후 저녁시간만으로는
도저히 부족해 아침시간까지도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건강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던 약수터를 새벽5시30분에서 4시30분으로 앞당겨 수면시간을
5~6시간으로 줄여야 했다.

초기에는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갖지 못하는 나를 식구들이 이해하지
못했으나 매일 밤낮으로 목표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본 가족들은 점차 이해를 하게되었고 아이들도 열심히 노력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덩달아 늦게까지 공부하는 등 가족 전체가 배우려는
분위기로 바뀌어 예전보다 더욱 즐거운 가정이 되었다.

이러한 나의 노력과 가족들의 뒷받침 결과, 94년 12월말에는 드디어
1천2백52건의 제안실적을 올렸고 채택률도 74% 수준을 기록, 공장 최다
제안상을 93년에 이어 또 수상하게 되었다.

처음 목표를 설정할때는 그렇게도 높고 멀어만 보였는데 1천2백52건이라는
초과달성의 결실을 거두었다.

1천2백건이 넘는 제안중에서 "폐기물 보관소 배수맨홀 유수분리장치"의
문제점 파악차 현장에 갔다가 맨홀에 빠지는등의 고초도 겪었으나 작업복에
기름이 쉽게 스며드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필터(부직포)로 차단막을
설치, 기름유입을 완전히 차단해 환경관계자와 상사로부터 공해방지 차원
에서 우수한 제안이라는 평가와 함께 찬사를 받았을때의 가슴뿌듯함, 측정
기구 개선에 관해 타 부서에 제안했을때 "우리는 허수아비인가? 눈만 뜨면
하는 일에 네가 뭘 아는게 있다고 배놔라 감놔라 해?" 하면서 심한 질책을
받을때는 가슴 아팠지만 지금까지 매우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새삼 느낄수 있었다.

제안목표 1백건에 도전하면서 5년을 목표로 한 품질명장의 꿈이 2년이나
단축된 3년만에 실현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추구해온 모든 활동이 결코 최고, 최상의 수준을 달성했다고
보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방식들이 최선, 최고의 방식으로 계속 남을
수는 없다"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 나를 일깨우고 거듭 재무장시키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