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의 경영애로사항을 조사해보라.

그러면 언제나 어김없이 첫번째로 떠오르는 항목은 "자금난"이다.

지난 수십년간 어느기관에서 조사를 하더라도 항상 그랬다.

도대체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일까.

왜 풀리지 않는 것인가.

그동안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정말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중 어느것 하나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내용은
없었다.

왜냐하면 자금난에 대한 원인분석이 너무나 비슷비슷하고 해결방안도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금융대출규모가 기업의 자금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은행문턱을 낮춰야 한다거나 자금공급규모를 늘려줘야 한다는 것만 거듭
강조하고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러한 해법으론 결코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해소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지금까지 나온 원인분석과는 전혀 다른 이유를 한번 제시해보겠다.

그 진짜의 이유를 알고나면 누구든 "아, 그렇구나"라며 무릎을 칠 것이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강관 제품을 생산하는 보원강업제조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회사는 철강 대리점으로부터 강관원료을 구입할때 70%를 현금으로 주고
30%는 외상에 산다.

반면 이 회사가 건설업체에 강관구조물을 납품할 땐 원료구입때와는
거꾸로 70%를 외상에 팔고 30%만 현금으로 받는다.

외상판매기간은 4개월에서 6개월정도.

보원강업의 거래방식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에게 있어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거의 모든 중소기업이 이런 거래구조안에 놓여 있다.

현재 보원강업의 원료구매액은 10억원수준.

따라서 원자재를 살땐 7억원을 현금으로 줘야 하고 제품을 팔땐
3억6천만원만 현금으로 받는다.

자, 여기서 계산을 한번 잘해보자.

살때는 현금을 7억원주고 팔때는 현금을 3억6천만원 밖에 받지 못했으니
현금흐름상 보원강업제조는 항상 3억4천만원이란 현금부족 상태를 당하게
된다.

바로 3억4천만원의 운전자금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12억원매출인 보원의 경우만해도 거래구조상 저절로 3억원이상의
자금수요가 발생하게 되지만 1백20억원 매출인 업체라면 적어도
30억원이상의 일시적인 운전자금수요가 발생한다.

이같은 자금부족액에다 중소제조업체 30만개를 곱해보라.

어마어마한 자금부족액이 발생하지 않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이것만으로도 그동안 거론돼오던 자금난의 발생원인은 금융공급부족
때문보다는 거래관행의 잘못이 더 크다는 사실이 확실히 판명되지 않은가.

살땐 70%가 현금,팔땐 30%가 현금이란 거래구조속에선 항상 40%의 자금갭을
당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선 자금공급
규모확대방식으론 결코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이 풍토병을 치료하려면 딱 두가지 방법밖엔 없다.

중소기업이 현재 처해있는 거래관행의 연결끈을 완전히 끊어놓든지 아니면
연결끈에 윤활유를 부어넣든지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연결끈을 끊어버리려면 먼저 하도급거래공정법에 따라 절대 60일짜리
이상어음은 끊어주지 못하게 해야한다.

장기적으론 어음발행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윤활유를 치는 방법으론 금융기관이 어떠한 상업어음이든 담보없이
즉시 할인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해법의 선택권이 중소기업자에게 있는게 아니라 정부측에
있다는 것이 비극중 비극이다.

<이치구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