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제해양법재판소 초대재판관에 피선돼 화제를 모았던 박춘호
고려대 석좌교수는 올해 또 한차례 영광을 안았다.

지난달 28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세계국제법학술원 제68차
총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회원에 당선된 것.

세계적으로 내로라 하는 원로 국제법학자들도 ''재수'' ''삼수''를 해서 겨우
들어가는 관문을 67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첫번째 시도만에 통과한
것이다.

국제법학계의 원로원격인 세계국제법학술원 회원의 평균 연령이 약 80세
이기 때문에 박교수는 상대적으로 젊은축에 드는 셈이다.

국제해양법 재판관 피선이후 한국 국제법학계로서는 두번째 쾌거를 이룬
박교수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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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 사람 = 손상우 < 정치부 기자 > ]

-국제법학술원이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데요.

"이 단체는 학술단체로서는 유일하게 1904년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1899년 체결된 제1차 헤이그조약에 "분쟁의 평화적 해결원칙"을 삽입한
공로 등을 인정받은 거죠.

2년마다 한번씩 회의를 갖는데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거의 국제법학계의
바이블로 통하죠"

-이번 회의에선 일본 중국 등에서도 후보를 냈다고 들었습니다만.

"국제법학술원은 정회원이 1백25명으로 80%이상을 유럽국가에서 차지하고
있어요.

아시아에서 10명, 아프리카 중남미 동구국가들을 합쳐 약 5~6명 정도입니다.

그만큼 배타적인 셈이죠.

중국측은 현직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이 입후보했고 일본도 저명한
국제법학자가 후보로 나섰지만 1차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탈락
했습니다"

-국제해양법재판관에 선출되신지가 벌써 1년여가 지났군요.

그동안의 의의를 말씀하신다면.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해양문제에 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점을 들 수
있겠죠.

일본과의 어업분쟁을 예로 든다면 사법처리까지 가면 안되겠지만, 불가피
하게 해양법재판소에 제소할 경우, 한국국적의 재판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협상에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작년 재판관 선출과 해양수산부설치 이후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많이
고조됐다고 봐요.

바다에 관한한 후발주자였는데 해양진출에 대한 명확한 의사표시를 한
셈이죠"

-해양수산부도 발족한지가 1년여가 됐군요.

그동안 노출된 문제점을 짚어주시죠.

"우리나라는 전문가를 키우지 못하고 있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해양수산부 발족 이전 수산청시절 해양전문가가 청장에 임명된게 한번밖에
없을 정도지요.

특히 바다문제 같은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분야는 더더욱 전문가
확보가 중요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자원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육상자원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표의 70%를 차지하는 바다자원
개발을 서둘러야 합니다.

석유 망간 등 지하광물을 대륙붕에서 캐내기도 하고, 매장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경제성 때문에 개발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기회는 수평선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해양자원 개발에는 인접 국가간의 마찰과 분쟁이 자주 빚어지기도 하는데.

"해양자원은 해중 해저 뿐아니라 해저하층의 지하자원에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해양에 관한 연안국의 관할권도 영공 해양표면 수중 해저
하층토 등 5개층의 입체적 구조를 갖게 됐습니다.

이같은 연안국의 관할권 확장은 새로운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제
해양문제는 국제적이고 지역적 성격이 한층 짙어지고 있습니다.

각 연안국의 일방적이고 독자적 대책만으로는 해결할수 없게 됐고 결국
형평성 위주의 자원배분의 시대가 된 셈이죠.

형평성은 협약조문의 형식적 적용보다는 각 당사국간의 합의를 전제로
합니다"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 배타적 경제수역획정문제로 협상이 진행중입니다.

바람직한 협상전략에 대한 교수님의 고견을 들려주시죠.

"3개국간 협상이전에 우선 중국 일본과의 개별협상이 선행돼야 겠지요.

지난번 베이징(북경)에서 열린 일본과 중국과의 협상은 우리 입장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습니다.

배타적 경제수역 획정은 지역문제로서 일본은 협상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반면 중국은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은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양국 사이에 끼여 있어 협상진행에 힘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협상을 미룰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배타적 경제수역을 명확히 정해놓지 않을 경우 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2백해리 경제수역은 지난 82년 해양법조약 체결이후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습니다"

-국제법이 국가간 분쟁해결수단으로서 제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국제법은 국가간 분쟁해결에 있어 하나의 기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권 국가간의 합의 역시 국제법이므로 정치적 합의가 성립해 국가의
의사표시로 확정되면 당사국간에는 일단 국제법적 권리와 의무가 성립합니다.

따라서 국제법의 효용을 국내법적 형식논리에 입각해 해석하거나 적용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외국어에도 상당히 능통하다고 들었습니다.

"국제법을 전공하다 보니 자연히 다른 주요국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영어 일어를 제외하고 중국어 독어 불어 등은 전공때문에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러시아어와 베트남어는 겨우 읽을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국제법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외국어에 약해 걱정입니다"

-특별한 외국어 학습비결이 있습니까.

"언어는 습관이니까 열심히 할 수 밖에 무슨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언어를 지식으로 생각하고 문법위주로 가르치는데 말한마디
못하는 언어학습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나는 비행기에 오르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게다가 비행기가 넓은 바다 위를 날 때면 나도 모르게 뛰쳐 나가 함께
날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되돌아 보면 지난 30년은 바다에 푹 빠지고 미친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끝까지 이길을 걷다가 내마음의 보금자리인 수평선 너머로 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 가보려고 지중해의 섬 크레타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곳은 인류가 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한 섬이라 할 수 있죠.

나를 길러준 조국 한국의 해양법 연구에 모기 발자국만한 흔적을 남기고
그곳에서 마지막을 보내려 합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