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신 <대한재보험 사장>

30년전 나는 브란넨부르그라는 북부 알프스산록의 작은 마을에서 3개월간
지낸 적이 있다.

10월이 되면 벌써 마을뒤편 벤델슈타인 산에 눈이 내리고 마을 전체가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다.

30년만에 브란넨부르그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실로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 마을에 다시 들어섰을 때 처음엔 옛날 기억을 더듬어볼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공부하던 외국인 어학교(괴테 인스티튜트), 처음 내렸던 정거장,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구경하던 작은 영화관, 서서 서울로 편지를 쓰던
우체국.

이런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는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지금도 또렷한데
막상 거기에 다시 갔을때 아무것도 찾을수 없었다.

내가 공부하던 괴테 인스티튜트는 어디에 있을까.

어렵사리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괴테 인스티튜트는 우리가 떠난 몇년후 폐쇄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시골 병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기억속의 옛 마을 풍경과 추억은 찾을수가 없었다.

온통 달라진 것이다.

나는 새로 생긴 길가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머릿속의 기억과 눈앞의 현실이 너무나 달라 멍한 기분이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어야 좋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지 않았더라면 내 마음속에서 더 아름답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다시 오지 않았다면 늘 오고싶어 아쉬워 했을 것이다.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라는 수필속에 어린시절 꿈이었던 아사코를
나이들어 다시 만나고,마지막에는 아니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쓴 것과 비슷하게 나도 브란넨부르그를 다시 보지 말았어야 좋았나 보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나는 지금 본 브란넨부르그가 진짜일까, 내 머릿속의
브란넨부르그가 진짜일까 혼란스러웠다.

내 머릿속에 있는 30년전의 브란넨부르그는 아직도 아름답고 영원히
가고싶어 안타까운 곳-그곳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