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39) 취금헌 박팽년 <9.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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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즉위년(1452) 10월1일에 박팽년은 집현전 부제학(정 3품,당상관)으로
승진하는데, 특히 단종이 박팽년을 존경하여 "학문을 정심하게 연구하여
매번 경연에서 진강할 때마다 깨우쳐 밝혀 주는 바가 많으니 가히 당상관이
될 만하다"고 칭찬하였으므로 이런 인사가 이루어졌다고 "단종실록(원명은
노산군일기)" 권 4에 기록되고 있다.
12월11일에는 김종서가 좌의정이 되고 박중림은 호조참판에 연임된다.
단종 원년(1453) 계유는 박팽년이 37세, 박중림이 54세가 되던 해이다.
7월28일에 박중림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등의
천거로 대사헌이 된다.
그런데 10월10일 수양대군이 대권 탈취를 위해 갖은 음모를 자행하다가
결국 좌의정 김종서를 해질녘에 찾아가 문밖으로 유인해 내어 시종한 가동
으로 하여금 숨겨간 철퇴로 때려 죽이게 하고 안평대군과 함께 모반을 도모
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운 다음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등을 그 밤으로 불러다 대궐 문 앞에서 쳐 죽이는 정변을
일으킨다.
안평대군은 거꾸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그 밤으로 잡혀서 강화도에 안치
되었다가 10월18일에 전격 사사되니 그간의 정황을 지켜보고 있던 박팽년의
심사가 어떠했겠는가.
스스로 주공을 자처하며 어린 왕을 성왕처럼 보필하겠다고 하는 수양대군의
처사를 지켜 보면서 제발 그렇게 되기만을 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종이 장성한 다음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 수양에게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을 신원시킬 수만 있다면 그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뜻을 같이
하는 집현전의 동지들과 저들의 폭거를 지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법이 무너진 세상이니 법으로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양은 집현전의 비중을 알고 있었기에 정변 이후에도 되도록이면 저들
집현전 학사들을 회유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한다.
저들이 모두 학문과 예술 방면에 출중한 재주를 타고났었던 안평대군과
지기를 허락한 동지들이란 사실이 수양으로 하여금 더욱 그들을 탐내게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정변 다음날인 10월11일에 인사개편을 단행하면서도 박중림을
호조판서로, 박팽년을 좌부승지로 발탁한다.
그리고 10월15일 정사에서는 박중림을 형조판서로 올리어 박중림으로
하여금 안평대군의 사사를 주관하도록 한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이이제이의 간교한 술책이었다.
기가 막힌 박중림은 안평대군을 사사한 지 열흘 뒤인 10월28일에 대사헌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던 사실을 들어 형조판서직을 계속 맡을 수
없다고 사직을 청한다.
그러자 11월8일에 박중림을 공조판서로 옮기고 10월26일 좌부승지로 승진
시켰던 박팽년을 다시 우승지로 승진시킨다.
그리고 11월21일에는 수양이 효령대군과 우의정 한확과 더불어 창덕궁에서
왕비를 간택하는데 우승지 박팽년도 동참시킨다.
단종이 존경할 뿐만 아니라 혜빈 양씨의 소생인 세종 제8서왕자 영풍군
전의 장인이라 왕실의 인척이 된다는 명분으로 동참시켰겠지만 사실은
부왕의 상중에 단종이 혼례를 치르는 것에 대한 집현전의 반대에 대비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12월19일의 처녀 재간택에도 박팽년은 참여하였고 12월26일 3간택에도
참여한다.
결국 박팽년은 단종을 감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측근에서 비빈을 간택해
들여 보내려는 수양일파의 술책에 넘어가 12월29일 도승지 최항, 좌승지
신숙주, 우부승지 권자신과 함께 왕비를 맞아들이라는 청을 하게 된다.
성삼문 등 동지들은 그것이 비례임을 들어 끝까지 반대하고 있었는데
박팽년은 여기에 휘말려 들었던 것이다.
단종 2년(1454) 갑술 1월6일에는 4간택에 참여하는데 혜빈 양씨가 수양의
속셈을 눈치채고 세종과 문종의 의도를 내세워 금성대군의 처조카 최도일의
따님과 금성대군 양모인 의빈 박씨의 친정 일가인 박문규의 따님을 간택하려
하였던 모양이니 필연 박팽년도 이 두 처녀를 간택하는데 찬성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4간택 과정에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듯하나 결국
수양측이 승리하여 1월10일에 수양의 죽마고우이며 영응대군의 처남인
송현수의 따님을 왕비로 간택한다.
박팽년은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에 간여한 것을 후회하고 1월21일에 부친
박중림과 같이 혼례 후에 다시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해 보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 되고 말았다.
박팽년은 수양대군과 혼례 전날인 1월23일까지 이 문제를 가지고 팽팽히
맞서 보았으나 모든 것은 수양의 의도대로 진행되어 1월24일 왕비를
맞아들이는 대례를 치르게 된다.
2월6일 박팽년을 어르기 위해 다시 좌승지로 벼슬을 올린다.
그리고 3월30일 춘추관에서 "세종대왕실록" 1백63질을 편찬해 올림에
박팽년도 편수관이라하여 말 1필을 하사받는다.
그런데 이때부터 수양은 어린 단종을 방종하게 만들기 위해 활쏘기와 사냥
잔치로 유인해 내어 경연을 자주 중지하게 만든다.
이에 박팽년은 5월4일 경연에서 왕에게 이를 간절하게 경계한다.
그러자 박팽년을 단종과 격리시키기 위해 8월5일에는 형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8월15일에 우의정 정분과 안평대군의 장자 이우직과 황보석및
김종서의 남은 아들들을 모두 교살하여 박팽년으로 하여금 그 처형의 책임을
지게 한다.
그리고 나서 단종 3년(1455)에 접어들자 왕위찬탈을 도모하려는 예비책으로
박팽년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보내고 2월26일에 박중림은 중추원사로 기용
하여 이들을 일변 안심시키고 일변 격리시킨다.
그리고 나서 윤 6월11일에는 단종의 마지막 남은 보호세력인 세종 후군
혜빈 양씨와 상궁 박씨, 금성대군 유, 한남군 어, 영풍군 전 등이 반란을
도모했다는 죄를 씌워 일시에 귀양 보내니 겁에 질린 어린 왕은 이들을
죽이지만 말아달라며 경회루 아래에서 어보를 수양에게 내어준다.
이때 서울로 올라와 입시해 있던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했었다 한다.
그 상황을 남효온(1454~92)은 육신전에서 이렇게 기술해 놓고 있다.
"을해년에 상감(세조)이 선위를 받자 팽년은 나랏일을 끝내 건지지 못할
줄 알고 경회루 연못에 나와서 스스로 빠져 죽으려 하니, 삼문이 굳세게
만류하며 이르기를 "바야흐로 이제 신기(옥쇄)가 비록 옮겨 갔지만 아직
상왕이 계시고 우리들이 죽지 않았으니 오히려 또한 뒷날을 도모할 수 있다.
도모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죽는다 해도 또한 늦지 않음에 오늘의 죽음은
나라에 보탬이 없다"하니 팽년이 이를 좇았다"
성삼문과 후일을 도모하기로 뜻을 모은 박팽년은 부친 박중림과도 뜻을
통하고 나서 그날을 기다리기 위해 흔연히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자 세조는 즉위년 8월 19일에 박팽년을 예문제학(종 2품)으로 불러
올리고 박중림은 동지중추원사에 임명한다.
세조 원년(1456) 병자는 박팽년이 40세, 박중림이 57세되는 해이다.
4월 7일에 박팽년을 형조참판에 연임 발령하더니 5월 3일에는 중추원부사의
한직으로 밀어내고 지중추원사로 있던 박중림을 5월 18일에 예문관 대제학
(정 2품)으로 옮긴다.
이러는 와중에 창덕궁으로 옮겨사는 단종으로 하여금 금성대군저에 내왕
하도록 담장을 헐어 문을 내게 하는 등 단종을 시해하려는 조짐이 엿보이자
성삼문과 박팽년 등 충의지사들은 더이상 복위를 미룰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삼문 일가와 친분이 두터운 본국출신 환관인 윤봉이 명나라
사신으로 온 것을 기회로 6월 1일에 상왕이 창덕궁에서 세조 부자와 그
측근세력들을 모두 초청하여 윤봉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세조
일당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저들의 꾀주머니인 한명회가 이를 눈치채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다음날인 6월 2일에 비겁자 김질이 그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이 일을 고변
하니 박팽년은 성삼문과 함께 잡히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이때 상황을 육신전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팽년 등이 사실이라 말하자 상감(세조)이 그 재주를 아끼어 몰래
타이르기를 "네가 나에게 귀순하여 처음 도모한 것을 숨기면 살 수 있다"
하니 팽년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상감을 부르는데 반드시 나으리라 함에
상감이 입을 틀어막게 하고 이르기를 "네가 이미 나에게 신하를 칭했었으니
지금 비록 일컫지 않는다 해도 이익이 없다"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상왕의
신하인데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었었겠소. 일찍이 충청감사를 1년 했지만
한번도 신하를 칭하지 않았었소" 한다. 사람을 시켜 그 장계 목록을 교열
하게 하니 과연 하나의 신자도 없었다"
신은 모두 거자로 써 놓고 있었다 한다.
이런 심정을 박팽년은 시조로 이렇게 읊고 있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연려실기술" 권 4에는 이개의 시조로 실려
있으나 잘못이다)
세조가 박팽년에게 그 공모자를 묻자 함께 거의한 사람을 당당하게 대면서
그 아버지 박중림까지 거명하고 더 묻자 자기 아버지까지 대는데 더 숨길
것이 있겠느냐고 호령하였다 한다.
세조는 박팽년이 이렇게 조금도 굴복하지 않는 것에 실성할 만큼 격노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니 박팽년은 6월 7일 옥중에서 숨지고 만다.
그러자 세조는 6월 8일에 성삼문 등 사육신과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 성삼문
의 부친 성승 등을 군기감 앞길에서 차열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데 박팽년의
시신도 그렇게 하였다 한다.
이후 그의 세 아우인 박기년, 박인년, 박대년과 매부인 봉여해도 6월 21일
에 능지처사되고 9월 7일에 그 아내 천안 전씨는 노비가 되어 영의정
정인지에게 내려진다.
이때 박팽년의 차자인 박순의 처 성주 이씨가 유복자를 잉태하고 있다가
대구 친정으로 내려가 낳게 되는데 마침 종이 딸을 낳아 이와 바꿔 길러
살려내게 된다.
이가 박비라 불려지던 박일산으로 이후 성종 3년(1472)에 그 이모부인
이극균(1437~1504)이 경상감사로 내려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국왕께
자수시켜 죄를 사면받게 하니 사육신중 오직 박팽년의 혈통만 이어지게
되었다.
박팽년의 처 천안 전씨(1417~99)는 충주 관비로 옮겨져서 83세까지 살다가
돌아갔는데 그 외손서인 이양손이 시신을 거두어 그 집 선산에 안장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6일자).
승진하는데, 특히 단종이 박팽년을 존경하여 "학문을 정심하게 연구하여
매번 경연에서 진강할 때마다 깨우쳐 밝혀 주는 바가 많으니 가히 당상관이
될 만하다"고 칭찬하였으므로 이런 인사가 이루어졌다고 "단종실록(원명은
노산군일기)" 권 4에 기록되고 있다.
12월11일에는 김종서가 좌의정이 되고 박중림은 호조참판에 연임된다.
단종 원년(1453) 계유는 박팽년이 37세, 박중림이 54세가 되던 해이다.
7월28일에 박중림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등의
천거로 대사헌이 된다.
그런데 10월10일 수양대군이 대권 탈취를 위해 갖은 음모를 자행하다가
결국 좌의정 김종서를 해질녘에 찾아가 문밖으로 유인해 내어 시종한 가동
으로 하여금 숨겨간 철퇴로 때려 죽이게 하고 안평대군과 함께 모반을 도모
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운 다음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등을 그 밤으로 불러다 대궐 문 앞에서 쳐 죽이는 정변을
일으킨다.
안평대군은 거꾸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그 밤으로 잡혀서 강화도에 안치
되었다가 10월18일에 전격 사사되니 그간의 정황을 지켜보고 있던 박팽년의
심사가 어떠했겠는가.
스스로 주공을 자처하며 어린 왕을 성왕처럼 보필하겠다고 하는 수양대군의
처사를 지켜 보면서 제발 그렇게 되기만을 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종이 장성한 다음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 수양에게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을 신원시킬 수만 있다면 그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뜻을 같이
하는 집현전의 동지들과 저들의 폭거를 지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법이 무너진 세상이니 법으로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양은 집현전의 비중을 알고 있었기에 정변 이후에도 되도록이면 저들
집현전 학사들을 회유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한다.
저들이 모두 학문과 예술 방면에 출중한 재주를 타고났었던 안평대군과
지기를 허락한 동지들이란 사실이 수양으로 하여금 더욱 그들을 탐내게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정변 다음날인 10월11일에 인사개편을 단행하면서도 박중림을
호조판서로, 박팽년을 좌부승지로 발탁한다.
그리고 10월15일 정사에서는 박중림을 형조판서로 올리어 박중림으로
하여금 안평대군의 사사를 주관하도록 한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이이제이의 간교한 술책이었다.
기가 막힌 박중림은 안평대군을 사사한 지 열흘 뒤인 10월28일에 대사헌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던 사실을 들어 형조판서직을 계속 맡을 수
없다고 사직을 청한다.
그러자 11월8일에 박중림을 공조판서로 옮기고 10월26일 좌부승지로 승진
시켰던 박팽년을 다시 우승지로 승진시킨다.
그리고 11월21일에는 수양이 효령대군과 우의정 한확과 더불어 창덕궁에서
왕비를 간택하는데 우승지 박팽년도 동참시킨다.
단종이 존경할 뿐만 아니라 혜빈 양씨의 소생인 세종 제8서왕자 영풍군
전의 장인이라 왕실의 인척이 된다는 명분으로 동참시켰겠지만 사실은
부왕의 상중에 단종이 혼례를 치르는 것에 대한 집현전의 반대에 대비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12월19일의 처녀 재간택에도 박팽년은 참여하였고 12월26일 3간택에도
참여한다.
결국 박팽년은 단종을 감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측근에서 비빈을 간택해
들여 보내려는 수양일파의 술책에 넘어가 12월29일 도승지 최항, 좌승지
신숙주, 우부승지 권자신과 함께 왕비를 맞아들이라는 청을 하게 된다.
성삼문 등 동지들은 그것이 비례임을 들어 끝까지 반대하고 있었는데
박팽년은 여기에 휘말려 들었던 것이다.
단종 2년(1454) 갑술 1월6일에는 4간택에 참여하는데 혜빈 양씨가 수양의
속셈을 눈치채고 세종과 문종의 의도를 내세워 금성대군의 처조카 최도일의
따님과 금성대군 양모인 의빈 박씨의 친정 일가인 박문규의 따님을 간택하려
하였던 모양이니 필연 박팽년도 이 두 처녀를 간택하는데 찬성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4간택 과정에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듯하나 결국
수양측이 승리하여 1월10일에 수양의 죽마고우이며 영응대군의 처남인
송현수의 따님을 왕비로 간택한다.
박팽년은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에 간여한 것을 후회하고 1월21일에 부친
박중림과 같이 혼례 후에 다시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해 보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 되고 말았다.
박팽년은 수양대군과 혼례 전날인 1월23일까지 이 문제를 가지고 팽팽히
맞서 보았으나 모든 것은 수양의 의도대로 진행되어 1월24일 왕비를
맞아들이는 대례를 치르게 된다.
2월6일 박팽년을 어르기 위해 다시 좌승지로 벼슬을 올린다.
그리고 3월30일 춘추관에서 "세종대왕실록" 1백63질을 편찬해 올림에
박팽년도 편수관이라하여 말 1필을 하사받는다.
그런데 이때부터 수양은 어린 단종을 방종하게 만들기 위해 활쏘기와 사냥
잔치로 유인해 내어 경연을 자주 중지하게 만든다.
이에 박팽년은 5월4일 경연에서 왕에게 이를 간절하게 경계한다.
그러자 박팽년을 단종과 격리시키기 위해 8월5일에는 형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8월15일에 우의정 정분과 안평대군의 장자 이우직과 황보석및
김종서의 남은 아들들을 모두 교살하여 박팽년으로 하여금 그 처형의 책임을
지게 한다.
그리고 나서 단종 3년(1455)에 접어들자 왕위찬탈을 도모하려는 예비책으로
박팽년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보내고 2월26일에 박중림은 중추원사로 기용
하여 이들을 일변 안심시키고 일변 격리시킨다.
그리고 나서 윤 6월11일에는 단종의 마지막 남은 보호세력인 세종 후군
혜빈 양씨와 상궁 박씨, 금성대군 유, 한남군 어, 영풍군 전 등이 반란을
도모했다는 죄를 씌워 일시에 귀양 보내니 겁에 질린 어린 왕은 이들을
죽이지만 말아달라며 경회루 아래에서 어보를 수양에게 내어준다.
이때 서울로 올라와 입시해 있던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했었다 한다.
그 상황을 남효온(1454~92)은 육신전에서 이렇게 기술해 놓고 있다.
"을해년에 상감(세조)이 선위를 받자 팽년은 나랏일을 끝내 건지지 못할
줄 알고 경회루 연못에 나와서 스스로 빠져 죽으려 하니, 삼문이 굳세게
만류하며 이르기를 "바야흐로 이제 신기(옥쇄)가 비록 옮겨 갔지만 아직
상왕이 계시고 우리들이 죽지 않았으니 오히려 또한 뒷날을 도모할 수 있다.
도모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죽는다 해도 또한 늦지 않음에 오늘의 죽음은
나라에 보탬이 없다"하니 팽년이 이를 좇았다"
성삼문과 후일을 도모하기로 뜻을 모은 박팽년은 부친 박중림과도 뜻을
통하고 나서 그날을 기다리기 위해 흔연히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자 세조는 즉위년 8월 19일에 박팽년을 예문제학(종 2품)으로 불러
올리고 박중림은 동지중추원사에 임명한다.
세조 원년(1456) 병자는 박팽년이 40세, 박중림이 57세되는 해이다.
4월 7일에 박팽년을 형조참판에 연임 발령하더니 5월 3일에는 중추원부사의
한직으로 밀어내고 지중추원사로 있던 박중림을 5월 18일에 예문관 대제학
(정 2품)으로 옮긴다.
이러는 와중에 창덕궁으로 옮겨사는 단종으로 하여금 금성대군저에 내왕
하도록 담장을 헐어 문을 내게 하는 등 단종을 시해하려는 조짐이 엿보이자
성삼문과 박팽년 등 충의지사들은 더이상 복위를 미룰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삼문 일가와 친분이 두터운 본국출신 환관인 윤봉이 명나라
사신으로 온 것을 기회로 6월 1일에 상왕이 창덕궁에서 세조 부자와 그
측근세력들을 모두 초청하여 윤봉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세조
일당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저들의 꾀주머니인 한명회가 이를 눈치채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다음날인 6월 2일에 비겁자 김질이 그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이 일을 고변
하니 박팽년은 성삼문과 함께 잡히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이때 상황을 육신전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팽년 등이 사실이라 말하자 상감(세조)이 그 재주를 아끼어 몰래
타이르기를 "네가 나에게 귀순하여 처음 도모한 것을 숨기면 살 수 있다"
하니 팽년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상감을 부르는데 반드시 나으리라 함에
상감이 입을 틀어막게 하고 이르기를 "네가 이미 나에게 신하를 칭했었으니
지금 비록 일컫지 않는다 해도 이익이 없다"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상왕의
신하인데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었었겠소. 일찍이 충청감사를 1년 했지만
한번도 신하를 칭하지 않았었소" 한다. 사람을 시켜 그 장계 목록을 교열
하게 하니 과연 하나의 신자도 없었다"
신은 모두 거자로 써 놓고 있었다 한다.
이런 심정을 박팽년은 시조로 이렇게 읊고 있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연려실기술" 권 4에는 이개의 시조로 실려
있으나 잘못이다)
세조가 박팽년에게 그 공모자를 묻자 함께 거의한 사람을 당당하게 대면서
그 아버지 박중림까지 거명하고 더 묻자 자기 아버지까지 대는데 더 숨길
것이 있겠느냐고 호령하였다 한다.
세조는 박팽년이 이렇게 조금도 굴복하지 않는 것에 실성할 만큼 격노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니 박팽년은 6월 7일 옥중에서 숨지고 만다.
그러자 세조는 6월 8일에 성삼문 등 사육신과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 성삼문
의 부친 성승 등을 군기감 앞길에서 차열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데 박팽년의
시신도 그렇게 하였다 한다.
이후 그의 세 아우인 박기년, 박인년, 박대년과 매부인 봉여해도 6월 21일
에 능지처사되고 9월 7일에 그 아내 천안 전씨는 노비가 되어 영의정
정인지에게 내려진다.
이때 박팽년의 차자인 박순의 처 성주 이씨가 유복자를 잉태하고 있다가
대구 친정으로 내려가 낳게 되는데 마침 종이 딸을 낳아 이와 바꿔 길러
살려내게 된다.
이가 박비라 불려지던 박일산으로 이후 성종 3년(1472)에 그 이모부인
이극균(1437~1504)이 경상감사로 내려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국왕께
자수시켜 죄를 사면받게 하니 사육신중 오직 박팽년의 혈통만 이어지게
되었다.
박팽년의 처 천안 전씨(1417~99)는 충주 관비로 옮겨져서 83세까지 살다가
돌아갔는데 그 외손서인 이양손이 시신을 거두어 그 집 선산에 안장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