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매일같이 강원도에 간다.

직장일이 끝나는 7시쯤 그는 자기 목숨만큼이나 사랑하고 아끼는 그만의
"들소"를 타고 강원도로 떠난다.

그렇게 매일 강원도로 떠나는 이유는 아직 물들지 않은 설악산의 단풍을
누구보다도 먼저 보기 위함이라고 했다.

"깜깜한 밤에 단풍을 보러 간다고?"

누군가 그에게 의아한 눈길을 주자 그는 오히려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 사람을 쳐다 보았다.

"밤에 단풍이 왜 안보이죠. 단풍은 달빛에 더 아름답게 보이는데"

그는 1백10V와 2백20V가 구별없이 섞여 있는 우리집 전기를 정리해 주기
위해 찾아왔던 전업사의 전기 기술자다.

그리고 그 후 나비처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벌처럼 떠벌린다.

무하마드 알리처럼.

남편도 신이 나면 꽤나 목소리가 큰데 세월이 흐르면서 조용해져 버렸다.

그러다 이 청년이 나타나면서 남편은 그 큰 목소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듯 누가 더 잘 떠드나 마음껏 신명을 낸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신명은 "할리 데이비슨"이다.

그는 그 오토바이야말로 아무나 타선 안된다는 것을 극구 주장한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차를 팔고 "할리 데이비슨"을 사라고 꼬드긴다.

신명나게 맞장구를 치다가도 그 부분에선 좀 너무했다 싶은지 웃음을
터뜨리는 남편에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아저씨. 오토바이는 멋진 남자들이 타는 거예요. 아저씨하구 저처럼요"

그렇게 그는 환갑이 넘은 내성적인 작곡가를 단숨에 친구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 말했지만 그는 전기 기술자다.

그는 그 일을 하면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일본제 오토바이를 샀다.

스즈키라는 일본 이름이 맘에 안들어 들소라고 이름을 바꿔 부른다.

그의 꿈은 "할리 데이비슨"이라는 이름의 오토바이를 사는 것이다.

나는 그 청년을 보면 여름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작렬하는 8월의 여름.그는 그렇게 에너지가 끓는 사람이다.

우리집엔 강아지 두 마리가 산다.

어느 날 한 마리가 자동차에 치여 죽었다.

일 나가다가 이 사실을 안 청년은 자기 일인양 팔을 걷고 우리집 마당에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남은 한 강아지를 안고 울타리를 설명하기 시작햇다.

"금동아. 넌 이제 여기서 놀아야 돼. 너까지 다치면 이 집 식구들은 너무
슬퍼할 거고 그런 모습을 보면 나 역시 가슴이 아프거든"

나는 늘어진 나뭇가지로 재치있는 울타리를 만든 청년의 재주에 감탄하고
바쁜 일손을 젖히고 강아지의 안전장치부터 서둘러준 그의 순발력있는 사랑
에 감동한다.

오늘 아침 그는 옥수수 세개를 가지고 우리집에 들렀다.

그리고 예의 그 옥수수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단풍을 보러 떠나는 밤길에 초라한 할머니 한분이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밤에 무슨 옥수수를 팔고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만약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 자리에 있으면 내가 꼭 사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설악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길목에 잠시 잊고 있었던 옥수수
파는 할머니가 아무도 없는 어둠속에 홀로 앉아 있는게 아닌가.

"할머니, 지금 이 시간에 누가 옥수수를 산다고 여기 이러구 앉아 계세요.
저한테 몇개 파시구요, 오늘은 그만 들어가세요"

그러자 그 할머닌 냅다 소릴 질렀다.

"총각이 뭔데 나보러 들어가라 마라야. 나 좋아서 앉아 있는 건데"

그가 고갤 들었을 때 할머니가 앉아있는 그 자리엔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는 그날 밤 달빛이 참 아름다웠다고 얘기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들소를 타고 누군가의 집으로 출장수리를 갔다.

그의 뒷자리에 실려있는 공구박스엔 그의 꿈이 같이 실려있다.

총선을 앞두고 경선에 승복한다 안한다, 국민의 부름으로 탈당한다 안한다
해가며 불쾌지수를 높이고 있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며 꿈을 키우고 있는 이 청년의 들소가 지나가는 소리가
한가닥 샘물같은 청량감을 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