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모임] 신광웅 <벽산건설 상무> .. '뫼오름 산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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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셋째 주말이면 벗을 찾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텅 비어버린
여의도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의 동료이며 친구들인 벽산건설.개발 뫼오름 산우회원들이다.
지난 92년 6월 박인섭 (개발사업팀근무) 산우회장을 주축으로 "벽산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이 만나 서로 도움으로써 회사의 발전은 물론 체력을
기르고 앞으로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하자"는 취지로 뫼오름 산우회는
설립되었다.
초대회장인 박인섭 산우회장이 금년에 다시한번 산우회장직을 맡아
임만택 등반대장과 함께 풍부한 산행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유적지에 얽힌
사연들도 꼼꼼히 챙겨주며 우리회를 이끌고 있으며, 김기옥 감사, 김문길
총무, 고영자 총무를 비롯한 50여명의 회원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산악회가 아닌 산우회로서 우리모임은 힘들고 어려운 산행보다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산행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작년 6월 산행은 필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의 두륜산 가련봉을
등반하여 필자에게도 아주 뜻깊은 산행이 되었다.
해남의 유명한 식당인 천일식당 떡갈비를 회원들에게 소개하자 오랜
이동으로 허기가 져있던 일행은 상다리가 휘도록 나온 26가지의 반찬,
전라도 특유의 맛깔스러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대흥사 입구에서 노랭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멍멍이가 표충사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고, 우리회의 명물인 김영찬 대리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나오자 그 위에 누워 산행을 마감해버렸다.
짙은 안개비를 뚫고 정상에 올랐으나 하산하는 길엔 한치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때문에 "이 산이 아닌게비여"를 연발하며 갖은 고생을 한 두륜산
산행은 일행의 기억에 남는 뜻깊은 등반으로 지금도 회원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뫼오름 산우회에서는 월 1회 산행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올해는 지난 2월
시산제를 시작으로 5월에는 지리산 천왕봉, 6월은 설악산 대청봉 등 국내의
고봉들을 차례차례 등반하고 있으며, 7월에는 중미산 자연휴양림에서 회원
가족들과 퇴사한 산우회원들이 함께 우의를 다지는 뜻깊은 자리도 가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30일자).
여의도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의 동료이며 친구들인 벽산건설.개발 뫼오름 산우회원들이다.
지난 92년 6월 박인섭 (개발사업팀근무) 산우회장을 주축으로 "벽산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이 만나 서로 도움으로써 회사의 발전은 물론 체력을
기르고 앞으로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하자"는 취지로 뫼오름 산우회는
설립되었다.
초대회장인 박인섭 산우회장이 금년에 다시한번 산우회장직을 맡아
임만택 등반대장과 함께 풍부한 산행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유적지에 얽힌
사연들도 꼼꼼히 챙겨주며 우리회를 이끌고 있으며, 김기옥 감사, 김문길
총무, 고영자 총무를 비롯한 50여명의 회원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산악회가 아닌 산우회로서 우리모임은 힘들고 어려운 산행보다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산행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작년 6월 산행은 필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의 두륜산 가련봉을
등반하여 필자에게도 아주 뜻깊은 산행이 되었다.
해남의 유명한 식당인 천일식당 떡갈비를 회원들에게 소개하자 오랜
이동으로 허기가 져있던 일행은 상다리가 휘도록 나온 26가지의 반찬,
전라도 특유의 맛깔스러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대흥사 입구에서 노랭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멍멍이가 표충사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고, 우리회의 명물인 김영찬 대리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나오자 그 위에 누워 산행을 마감해버렸다.
짙은 안개비를 뚫고 정상에 올랐으나 하산하는 길엔 한치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때문에 "이 산이 아닌게비여"를 연발하며 갖은 고생을 한 두륜산
산행은 일행의 기억에 남는 뜻깊은 등반으로 지금도 회원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뫼오름 산우회에서는 월 1회 산행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올해는 지난 2월
시산제를 시작으로 5월에는 지리산 천왕봉, 6월은 설악산 대청봉 등 국내의
고봉들을 차례차례 등반하고 있으며, 7월에는 중미산 자연휴양림에서 회원
가족들과 퇴사한 산우회원들이 함께 우의를 다지는 뜻깊은 자리도 가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