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과 관련, 실형을 선고받고 집행유예중이던
경제인 23명에 대한 정부의 특사발표가 지난 30일 나오자 반응은 엇갈렸다.

그러나 반론이 만만치 않은 속에도 그 조치가 경제난을 뚫는데 도움이
된다는 현실인식에서 환영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럼에도 반론은 경청할 만하다.

쿠데타와 정경유착에 대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의 단죄명분이 타당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잔형면죄 정도가 아니라 형 자체가 실효화되는,
집행유예에 대한 특사-복권 조치야 말로 현 정권의 개혁의지를 의심케
한다는 논리가 주였다.

그 외에 여당의 전당대회로 발표시기를 맞춘 것이 바로 대선을 의식한
정치적 의도 아닌가, 형선고를 실효시킬 만큼 망국적 정경유착의 폐습이
과연 사라졌으며 제도적 근절책이 마련되었다고 보는가를 비판론자들은
곁들여 묻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비판들이 적지 않은 타당성을 지녔다고 보며 정치권과
정부당국은 이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만큼 당당한 자기논리를 가지고 있는지
깊이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경제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자금 조성에 응할수 밖엔 없었다는
상황론리에만 의탁할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자기확신이 아쉬움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 접근에서 형식논리나 대의명분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식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굴지의 기업인들이 형사범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일부
집행됐거나 집행유예중이라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기업활동을 하는데
얼만큼 장애요인이 되고 있으며, 반대로 사면 복권을 통해 전과기록을
삭제해주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현실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장 평범하게 누구나 인정할수 있는 비근한 애로점은 대외활동
측면이다.

이미 선진국 포함, 많은 나라들이 입국서류에 전과에 관한 구체적 기록을
요구하고 있다.

집행유예 진행중은 물론 과거의 전과, 가령 관에 대한 증회를 구체적으로
신고하지 않을수 없는 기업인으로서 번번이 당하는 고충은 대단한 것이다.

그런 기록을 제시하고 들어온 외국 기업인에 대해 그 나라 관청이나
거래선은 어떤 대우를 할 것인지, 상상만으로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WTO(국제무역기구)출범후 선진권으로부터 반부패협약 요구가
드세지고 지난 25일엔 파리에서 증수회 추방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제 부패관행으로 대망신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뇌물이 통하지 않는 풍토조성 이상의 왕도는 없다.

그럼에도 무가내로 상부구조인 정치에서부터 관청과 사회 구석구석에
부패 퇴조의 기색이 보이지 않는 속에, 기업인의 의욕에 찬 투자활동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으니 어쩔 것인가.

권력에 뇌물을 주면 기업이 손해보는 시대가 과연 한국사회에도 올 것인가.

우리들 각자는 이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