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동두천 혼혈아를 데려와 외국인 학교에 보내며 키웠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 할머니가 내가 일하는 직장 앞에 초등학교 1학년짜리를 데리고와
무조건 맡기고 갔다.

할머니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고 식당 일을 하면서 근근히 손자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를 보는 순간 눈을 들여다 보았고, 그 아이의 눈에 정기가 전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여덟살짜리 아이가 세상을 다 살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 것에도 흥미가 없었고 "아이고 피곤해, 아이고 힘들어"라는 소리만
연발했다.

다음날이 마침 토요일이어서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그 아이는 전철을 처음보고 꾸역꾸역 기차라고 우겨댔다.

기차가 지하로 들어가면 전철이 된다고 이야기해 보았으나 "교과서에서
저런 것은 기차라고 하더라"며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마침 차창밖으로 푸른 하늘이 보여 하늘을 보라고 하니까 "하늘도 처음
보았다"고 했다.

나는 계속해서 시내를 달리며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라고
독려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너도 어른이 되어 저렇게 바쁘게 무엇을 하려고
달려가면 얼마나 뿌듯하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무수한 책과 물품들을 보면서 아이는 정신없이
눈을 돌렸다.

돌아와서 아이에게 일기를 쓰라고 했다.

아이는 "교보문고에 갔더니 사람들이 너무 많았는데 스무명도 더되는
것 같았다"고 썼다.

할머니는 아이를 내게 맡겨 놓고 못내 걱정이 되어 매일처럼 속셈학원에
안 보내느냐고 재촉했다.

이리저리 다니기만 할 것이 아니라 더하기 빼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속셈학원을 보내려고 이미 등록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눈에 정기를 다시 살리는 일이다.

삶은 흥미로운 것이라는 것을 먼저 느끼게 해야 공부를 할 것 아닌가.

나는 그 아이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야 말리라 다짐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