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이 어렵지만, 이럴때 일수록 문학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해준다.

시의 향기에 휩싸이면 잠시나마 고단하고 어지러운 세상사를 잊고
"행복한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시인 문충성(59)씨의 "바닷가에서 보낸 한철" (문학과지성사)과
이경림(50)씨의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박남철(44)씨의 "자본에
살어리랏다", 이원규(35)씨의 "돌아보면 그가 있다" (창작과비평사)가
한꺼번에 나왔다.

제주시인 문충성씨의 "바닷가에서 보낸 한철"은 고향과 근원의 문제를
통해 삶의 좌표를 일깨운다.

"수천만년 푸르르르/세상살이 물결들 고르고 새하얗게/바람 일게 하여
황금빛/그리움 모두 모아/눈부신 무지개 하나 세우리/삶과 죽음 깨우치며
바다여/한평생 가난가난/그대 품안에서 연보랏빛/서러운 꿈/짓다 가리/
오늘도 목숨속엔 칼날같은 수평선 눈떠 있어/나의 잠 흔들어 깨우고"
(문충성 "암행1")

풍랑과 해일에 부대끼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가
돋보인다.

시집에 펼쳐진 제주 바닷속에는 "삼성혈" "지미봉" 등 섬의 슬픈 역사와
"미국산 오렌지나 까먹으며" "제주 토박이말" 등에 새겨진 아픔이 담겨
있다.

이경림씨의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는 힘이 느껴지는 시집.

여성시인의 문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강한 울림과 함께 세상을
감싸안는 모성이 담겨 있다.

육체에 관한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도 눈길.

"희양산 계곡 물속에서 돌 하나 보았다/(중략)/물의 미세한 결이 다
보였다/순간이었다, 그를 벗어난 물은 태연히/다른 몸들을 넘어갔다/
어둑한 몸들을 넘어가는 물소리가/계곡을 꽉 붙들고 있었다" ("돌")

박남철씨의 "자본에 살어리랏다"는 삶이 풍자와 익살, 사랑과
상처투성이의 세상속에 갇혀있음을 보여준다.

우상과 형태파괴에 주력해온 그는 이번 시집에서도 "20세기말의 핏빛
일몰"로 고전을 패러디한다.

이원규씨의 "돌아보면 그가 있다"는 지름길을 두고도 먼길을 돌아가는
나그네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결핍과 상실감,끊임없이 떠나고 싶은 마음을 비추면서 "비어있는
또다른 나"를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다.

세상의 수레바퀴속에서 흔들리며 그 바퀴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유혹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 것이 읽는 이의 공감대를 넓혀준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