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모녀는 시끄러운 골프연습장 앞에서 연습자들의 웃음소리와 경쾌한
골프공 날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안을 기웃거린다.

"저기 삼번이라고 쓴 데에서 연습을 시키고 있는 키 큰 남자에요"

"계집애가 하필이면 골퍼냐? 그것도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정말 너
웃기는 아이야"

그러나 멀리서 보니 그가 지영웅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많이 달라 보이는 것은 그가 너무 태양에 그을려서 전혀 다른 남자같이
보여서다.

"저 남자가 너를 유혹했니?"

"아니. 내가 유혹했는데 실패했어. 어머니에게 물어볼 일이 너무 많아요.

나는 완전한 여자가 아닌가봐요.

석녀야 나는. 아니면 뭔가 발육부진이구"

"해괴한 소리말고 여기 서 있어. 내가 나올 때까지"

공박사는 삼번 연습장쪽으로 가면서 점점 가슴이 덜덜덜 떨려온다.

다름 아닌 지영웅이 틀림없다.

이제 이 노릇을 어찌 하랴? 압구정동의 유명한 콜보이이고 지글러인
지영웅에게 하필이면 내 딸이 반했다니 이런 기막히는 경우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는 지코치에게 다가가다가 돌아선다.

해결 방법은 그를 만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아가 그를 단념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그는 만사를 머리로 해결하는 정신의학 박사이다.

그녀는 얼른 발길을 돌려서 밖으로 달려나온다.

그리고 미아의 손목을 끌고 연습장밖에 있는 호사스러운 카페로
들어간다.

냉방이 잘 된 그 카페는 낮에도 대만원이다.

겨우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마주앉았다.

커피를 시킨후 공박사는 다정한 눈길로 미아를 바라보면서 따뜻하게
웃는다.

"미아야. 나는 그 남자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떻게요?"

"그 남자는 지난 봄에 나에게 왔던 환자야"

"무슨 병인데?"

"그때는 좀 심했어. 나쁘게 듣지 말아. 내 노트에 기록이 전부 남아
있다"

"엄마 이름을 모른다던데"

"정신과에 온 것이 뭐가 자랑이라고 치료를 받았다고 하겠니?"

"그 오빠가 지글러라지만 나는 그를 재생시키고 싶어요.

만약 과거가 나빴다면 말이에요"

"그 남자는 여러 중독증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약만 빼고는
다라고 할 수 있는 중증의 과대망상에다가 낭비벽에다가.

너 알지? 쇼핑 중독이랑, 연상 여자 취미랑. 뭐 이루 말로 하기 힘든
중증의 환자였어. 그런 남자를 네가 왜 맡니? 네 인생은 이제부터 꽃피어야
하는데"

"어머니, 그 기록들을 보여주세요.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그는 그렇게 무책임하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타락도 안 했어요.

전혀 그 반대에요.

내가 덤벼드는 걸 겁냈어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