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 예술의 전당 예술감독 >

한국 오페라는 관객으로부터 외면받아온지 오래다.

관객의 수준이 올라가고 있는 것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대부분의 공연은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느껴질 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관객은 "오페라란 어렵고 지루한 것이며 우리 민족문화
가 아니라는 것" 등의 선입관을 이유로 오페라를 외면했었다.

그러나 이제 관객은 선입관을 버리고 빠른 속도로 예술적 판단력을 지녀
가고 있다.

관객이 재미없게 느끼면 그것은 바로 재미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돈이 엄청나게 드는 오페라를 왜 만드는가" "오페라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가" 따위의 질문은 여기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오페라가 한국에서 이미 반세기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면 존재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서양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2세기 전에 이미 귀족과 평민을 한 자리에 모아
한 공연을 보여 주는 오페라 하우스가 생김으로써 오페라는 초창기에 이미
"보편적"인 예술 장르로 출발했다.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오페라는 또한 시초부터 이탈리아 "민족문화"가
아니었다.

오페라가 4백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본래의 성격 때문이다.

오페라는 오늘날 국제 스포츠 경기처럼 세계인이 한자리에 모일수 있는
가장 "세계로 열린" 예술 장르다.

민족고유의 전통예술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시점에서 관심을 보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오페라는 왜 재미없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근본적으로 시스템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반세기 전에 운명적으로 잘못 출발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하우스가 생긴 17세기초에 오페라는 베니스의 상인들에 의해
"흥행사업"으로 정착했다.

오페라 하우스의 주인(Impresario)은 "예술가"가 아닌 "장사꾼"이었고
극장주의 목적은 오로지 돈을 벌자는데 있었다.

돈벌이를 원한 흥행주는 관객의 취향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흥행주는 그러한 관객의 취향에 맞도록 비극(대체로 귀족 취향), 희극
(대체로 평민 취향)을 번갈아 배치해 가며 관객에게 인기있는 가수들을
주역으로 내세웠다.

시민혁명에 이어 19세기가 되면서 새로 생긴 시민계급은 이전과 비교할수
없는 큰 규모의 관객층이 되었고 이제 눈이 높아진 관객은 작품의 우열을
구분할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점점 작곡가의 권위가 올라가게 되자 흥행주들은 비싼 보수를
치르며 이들에게 작품을 청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들이 "베르디" "푸치니", 그밖의 누구누구의 소위
"명작"들인 것이다.

관객은 돈을 치르는 대신 거기에 상응하는 오락을 원한다.

예술가는 양측을 이용하여 자기의 세계를 펼친다.

예술가의 세계를 접한 관객은 그만큼 문화에 대한 심미안이 높아지며
상업주의를 견제한다.

흥행주는 관객에게서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번 돈을 재투자한다.

세계의 오페라공연은 지금까지 이 패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공연물은 극장이 만드는 것이며 극장의 정말 주인은 바로 관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출발한 것에 한국 오페라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1948년 한국 오페라가 첫발을 내디딘 것은 오페라를 하고 싶은 성악인들의
욕구가 동기가 되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공연자금이 있을리 없었고 관객이 아닌 "구경꾼"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한국 오페라는 관객을 위한 흥행보다는 성악인들의
"리사이틀"의 성격이 짙었다.

다시 말하면 "객체"가 되어야 할 것이 "주체" 노릇을 해온 것이다.

한국 오페라는 첫 공연을 할 때부터 성악인들이 주도한 이래 오늘날까지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페라 공연도 건축과 마찬가지로 미학적인 것이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 철저히 역학적이어야 한다.

출연자(성악인)들이 주도하는 오페라는 어떠한 논리로도 그 튼튼함을
증명하지 못한다.

관객에게 외면당하는 것은 당연할수 밖에 없고 관객을 도외시한 공연에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꿈꿀 수도 없는 일이며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지지 않는 한 재능있는 성악인이 많아도 별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