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의 부도가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의 도산은 일파만파의 회오리를 몰고 온다.

외채가 쌓여 세계 세번째의 채무국이 됐다.

대외신용이 떨어지고 환율과 금리는 치솟아 금융위기로 치닫고 있다.

사람들은 실직의 위험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17조원의 혈세가 들어가는 경부고속철도사업은 부실로 만신창이가 돼
있어도 책임지는 사람조차 없다.

증권시장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기댈 곳 조차 없다.

정치권은 기존틀이 무너지고 있으며 정부의 관리능력을 믿는 사람도 없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 경제는 이대로 무너지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생존환경의 엄청난 변화에 당면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추위가 서서히 다가온다면 적응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예고없이 한파가 몰려온다면 어떻겠는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갑작스러운 생존환경의 격변으로 인한
기존 생존질서의 붕괴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루속히 새 환경에 맞는 새로운 생존질서를
창조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밀어닥치고 있는 생존환경변화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대중적 실업경제에서 완전고용경제로의 이행이다.

이 변화는 경제성장면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저임금사회는 고임금사회로, 그리고 국민욕구는 기본수요에서 향락수요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지난 10년동안 주당 노동시간은 52시간에서 48시간으로 줄고
임금은 4배이상으로 뛰어 올랐다.

이렇게 되면 고용증대에서 오는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 없으며 노동의
생산성 증가에서만 경제성장이 나오기 때문에 경제성장은 갑절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단계는 인구의 노령화 및 복지욕구의 폭발단계와 겹치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부담이 가중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 크게 문제되는 것은 경제성장에 있어 기존 저임금
엔진의 무용화이다.

이는 즉 고비용경제의 시작을 뜻하며 나아가 감속성장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생존환경변화는 개방경쟁이라는 대외적 요인이다.

이것은 국내외의 모든 경제적 칸막이를 일시에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생물체는 모두 침수침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경제의 경쟁력이 되살아 난 것은 미국이 세계화질서의 으뜸가는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당장 개방경쟁의 피해자이며 이것이 현경제위기를 유발한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면 이와같이 대내외에서 밀려오는 두가지의 생존환경변화는 우리경제에
어떤 결과를 파급시키고 있는가.

첫째로는 산업의 위기이다.

고임금과 개방이라는 두가지의 충격은 우리산업의 경쟁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국은 기술경쟁력면에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 밀렸으며 노임경쟁면에서
는 중국을 비롯한 후발국들에 당할 수 없었다.

특히 농업.중소기업.유통업.금융.서비스.건설업 등 종래 보호하에 있던
내수산업들이 모두 붕괴위기를 맞았으며 모든 산업의 수익률이 하락함에
따라 산업의 불황과 도산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과욕구 과지출이 유발한 거품경제이다.

완전고용점을 지나면서 나타난 임금의 급상승과 향락욕구의 팽창은 생산
경쟁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과지출로 치닫게 했다.

더구나 개방의 물결은 소비재수입의 홍수와 국내 가격의 파괴, 해외관광
붐과 소비전시효과 등을 유발하게 된 것이다.

셋째로 만성적인 적자경제이다.

누적되는 국제수지 적자는 불황경제와 거품경제의 합작품이며 이것이 현
경제위기의 심층부에 도사리고 있는 진원이다.

대외 경상적자는 올해에도 1백60억달러에 이를 것인데 여기에 원리금상환액
1백50억달러를 합하면 3백억달러 이상의 외채를 더 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연말 외채는 1천3백억달러에 이르러 브라질과 멕시코 다음의
채무국이 되는 것이다.

빚이 많기 때문에 국가신용이 추락하고 환율이 오르며, 환율이 오르기
때문에 외국자본은 빠져 나가고 빚을 얻기 어려워지는 금융위기의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경제난국을 자초한 정책의 책임은 없는 것인가.

현 경제위기는 성장환경변화에 대한 적응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적응
실패는 곧 정부의 정책실패 때문이다.

정부의 대응정책은 무엇이 잘못이었던가.

먼저 거시정책의 실패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의 본질이 고비용과 거품이라 함은 이미 지적한 바이다.

그렇다면 90년대 들어서의 거시정책기조는 마땅히 생산비 인하와 거품
제거에 맞추어야 했으며 그러한 정책이 바로 안정과 내실을 우선하는 감량
내핍정책이다.

80년대말에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거품경제의 소용돌이를 겪은바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뒤 수년간 일관되게 감량정책으로 안정기조를 다져 경제
활력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93년 문민정부 출범이후 "백일계획" 또는 "신경제"라는 기치아래 확대
정책으로 선회하며 고도성장을 추구해 왔으며 그 결과로 고비용과 거품을
확대 재생산하는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기업은 부실화하고 경쟁력은 약화되었다.

그리고 경상수지 적자는 해마다 눈덩이처럼 부풀어 왔지만 지금까지
이것을 수수방관 해오지 않았던가.

또 하나의 정책실패는 정책의 무계획성 비현실성으로 인한 정책효과의
공전이다.

성장환경변화에 대한 정책의 기본틀을 개방과 자유화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책방향은 매우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필요한 준비가 선행돼야 하고 거쳐야 할 단계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방을 해도 우리 경제가 견딜 수 있는 장치를 하고 나서
개방해야 하며 자율화하여 시장기능에 맡길 때에도 기업체질과 시장풍토를
그런 방향으로 정비하는 일을 먼저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시책은 그 방향이 옳으면서도 번번히 헛돌고
말았다.

부실기업의 정리, 규제완화, 금융자율화 등 일련의 정책들이 그 사례에
속한다.

부실기업과 금융자율화문제를 예로 하여 보자.

은행을 개방하여 예대마진을 내리고 기업도산에 따른 부실채권도 은행이
알아서 하라는 것은 원론적으로 옳다.

그러나 은행에 엄청난 부실채권을 떠 넘기는 기업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자율화는 기업의 부채의존적 경영풍토가 함께 바뀌지 않는 한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며 이때문에 금융자율화정책이 공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경제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경제는 지금까지의 공업화 도약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완전고용점을 넘어 성숙단계에 진입하면서 고비용.저능률.고욕구의
덫에 걸려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

앞으로 임금이나 금리, 그리고 땅값이 더 내려갈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시적인 미조정이 아니라 성장의 틀을 다시
짜는 한국경제의 개조이며 이를 위한 기반조성에 나서야 한다.

첫째로 정부의 거시정책은 향후 2~3년간 감량내핍정책과 저성장정책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정책은 고비용 고욕구의 거품을 제거하고 국제수지 개선과 안정
기조를 확고히 다질때까지 가야 한다.

정부는 재정을 긴축하고 기업은 감량조정을 실천해야 한다.

근로자들은 임금을 계속 묶어두고 소비자들은 생활수준을 내려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내년초에 들어설 새정부도 이러한 정책기조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새정부가 경기회복정책으로 선심을 베풀려
한다면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 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산업조직과 기업경영을 개혁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수난은 우리나라의 선단식 경영, 차입의존적
경영, 정경유착 경영, 소유와 경영의 세습, 그리고 양중심경영의 필연적
소산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구시대적 기업체질은 개방과 고임금의 새로운 기업환경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풍토의 후진성을 쇄신할 수 있는 개혁을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시정되면 금리는 선진국수준으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고금리의 근본원인은 저축보다 투자가 많기 때문이며 그 주범은 바로
기업의 과잉투자에 있다.

따라서 금리를 내리게 하는 올바른 방법은 기업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내실경영을 다지는 것이며 부채의존적인 확대경영에서 손을 떼는 일이다.

셋째로 노동시장을 개혁해야 한다.

완전고용점을 지난 금후의 노동시장은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이제 경제성장은 고용증대에서 나오지 않고 노동력의 생산성 증가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노동력의 생산성증가는 노동의 유동화가 대전제가 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력이 단순노동에서 기술전문직으로, 그리고 사람이 남는
저생산성부문에서는 노동력을 방출하고 새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성장산업과
신기산업은 이를 흡수하는 형태의 노동력이동이 자유롭고 활발하게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노동조합의 역할도 시장기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며 근로자들의 생활향상은 임금인상 보다도 가족들의 노동참여증대를 통해
실현토록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생활의 합리화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산업의 노동생산성은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근로자들의 월급은
선진국과 거의 맞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질이 낮은 것은 불합리한 생활때문이다.

결혼축의금과 장례식 부의금, 저녁술값과 외식비용, 자녀 과외수업비...

이러한 지출은 선진국에서는 쓸필요가 없는 사중비용이다.

우리의 생활을 합리화한다면 월급을 올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삶의 질을
높일수 있다.

우리경제는 지금 엄청난 환경변혁의 소용돌이속에 서 있다.

지금 밀려오고 있는 온갖 정치적 경제적 혼란과 위기는 새환경과 충돌하는
기존질서의 붕괴현상이다.

이것은 아픔을 수반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아픔을 딛고 새환경에 맞는 정치.경제.사회면에서
의 새 질서를 창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모든 주체들의 자기혁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