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정치권의 이전투구에 기업들만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

"김대중 비자금 파문"을 대하는 재계의 반응이 "전.노 비자금 사건"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노 사건 때의 재계 반응은 한마디로 당혹감 그 자체였다.

국정감사장에서 박종근 의원이 비자금 리스트를 폭로하자 연루된 기업들은
저마다 비상대책회의를 여는 등 벌집 쑤셔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달라진 모습이다.

당혹스러워하기보다는 "이번에도 우리가 속죄양이냐"하는 강한 반발과 함께
냉소적인 반응이 앞서고 있다.

우선 재계의 본산인 전경련부터가 달라졌다.

전경련의 고위관계자는 "정치권의 불똥이 경제계로 튀는 일은 이제 지양
돼야 한다"며 "조만간 회장단회의를 열어 비자금 문제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비자금파문이 재발되지 않도록 재계차원에서 대책을 마련
하겠다"고 말해 정치자금문제 등에 대해 모종의 대안을 강구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번 파문에 직접 연루된 개별 기업들의 동향도 전과는 다르다.

비상대책회의라든지 긴박한 모습은 별로 없고 정치권을 비난하는 목소리
에도 전.노 사건 때보다는 훨씬 힘이 실려 있다.

모 그룹의 관계자는 "파행적인 정치권의 행태로 인해 기업인들이 수난을
겪는 악순환이 소위 5공 청문회에서부터 거듭되고 있다"며 "정치권의 개혁이
없이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그룹의 관계자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정국과 관련해서도
기업들이 알게 모르게 정치자금 제공압력을 받고 있는게 우리의 정치현실"
이라며 "그런데도 일이 터지면 당하는 것은 기업들"이라고 개탄했다.

기업들은 특히 이번 비자금파문이 최근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골을 더욱
깊게 할 것이라며 정치권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대기업의 잇따른 부도로 그렇지 않아도 땅에 떨어진
국내 기업들의 대외신인도가 더욱 추락할 것"이라며 "기업들이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상관도 않는 정치권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대우그룹 관계자도 "환율불안 등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져 기업들은 당장
내년도 사업계획조차 손을 못대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하면서 "기업인들이
경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정치풍토가 아쉽다"고 덧붙였다.

< 임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