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매매계약금이나 잔금은 일반적으로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주고
받는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 제3자를 돈의 전달통로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때 배달사고가 나면 부동산 구입자는 낭패에 빠지게 된다.

이모씨의 생생한 사례를 알아보자.

이씨는 지난 95년 5월 복덕방에 들렀다가 서울 신내동 소재 밭 1백여평을
사기로 했다.

복덕방 주인은 강모씨.

땅주인 임모씨는 한동네에서 호형호제하던 강씨에게 이 땅을 팔아달라고
부탁해놓고 남양주시에서 혼자 소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이씨는 다음날 강씨와 함께 임씨를 찾아가 즉석에서 1억4백만원짜리 매매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금으로는 1천4백만원을 줬다.

중도금과 잔금은 은행 온라인을 이용해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임씨에게는 온라인 송수금이 안되는 통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임씨에게 통장을 새로 하나 개설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임씨는 "그럴 필요없다.

강씨에게 부치면 내가 건네받을수 있으니까 강씨가 이용하는 국민은행
구좌를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이씨는 강씨의 구좌로 4차례에 걸쳐 8천만원을 송금했다.

그런데 강씨는 이 돈중 처음 송금된 2천만원만 임씨에게 전달하고 나머지는
모두 도박자금으로 날려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씨는 강씨를 횡령죄로 고발했고 강씨는 지난해 1월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횡령한 돈 8천만원 중 돌려받은 돈은 겨우 2천5백만원에 불과했다.

이씨는 임씨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임씨는 "받은 돈이 없는데 뭘 반환하느냐"며 발끈했다.

오히려 "잔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매매계약을 해지하며 계약금은 계약위반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반환하지 않겠다"고 통보해왔다.

임씨가 시킨대로 잔금을 보냈던 이씨로서는 황당한 일이지만 이씨측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이씨는 임씨를 상대로 매매대금 반환소송을 냈다.

자신은 분명 임씨가 지정한 사람에게 잔금을 줬으므로 잔금은 모두 지불된
것이며 돈을 다 줬는데도 또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매매계약을
깨는 것이니 매매대금을 돌려달라는 주장이었다.

1심을 맡은 서울지법 북부지원, 2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모두 원고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민사5부(재판장 이융웅 부장판사)는 16일 1심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임씨측에 "이유없다"며 기각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가 강씨를 동생으로 생각한다며 강씨의 구좌를
이용하자고 먼저 제의한 점, 강씨가 입금된 돈중 일부를 임씨에게 전달한
적이 있는 점 등에 비춰볼 때 피고는 강씨에게 잔금을 대신 수령할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며 "따라서 원고가 강씨에게 잔금 8천만원을 지급한
것은 임씨에게 지급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임씨측은 이씨에게
6천9백여만원을 반환하라"고 밝혔다.

< 김인식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