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통화위기가 정치혼란으로 옮겨 붙었다.

태국의 반정부시위를 비롯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정부의 지지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들 4개국 지도자들의 정권기반약화는 7월2일 동남아통화위기후 1백여일
만의 상황이다.

경제를 위기상황에 몰아넣고는 결코 정치안정을 누릴 수없다는 평범한
교훈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태국 방콕에서는 20일 "넥타이부대"들이 반정부데모에 나섰다.

차왈릿 용차이윳 총리에게는 경제난타개의 능력이 없으니 사퇴하라는
요구다.

넥타이부대의 시위는 학생시위와 성격이 다르다.

도시중산층의 정권이반을 의미한다.

차왈릿총리는 최근 재정적자를 해결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석유세인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30%(7월2일이후)를 넘는 바트화절하로 호주머니사정이 나빠진
국민들은 예상된 반발을 보였고 차왈릿은 3일만에 방침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논재무장관이 경제딜레마를 처리하지 못하고 사의를 표명한 것은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제2당(개발당)의 찻차이 당수는 악화된 국민감정에 편승, 차왈릿내각을
몰아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찻차이의 개발당이 재무 상업 농업등 경제부처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개발당이라고 경제딜레마를 손쉽게 해결할 것으로 보는 분석가는
없다.

방콕의 공실율(빈 사무실비율)이 내년에는 30%에 달하고 영업정지를 당한
58개 금융회사중 절반이상이 정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최악의 경제상황이다.

석유세인상 해프닝에서 보듯 재정확충을 위해서는 세금을 올려야 하지만
이를위해 국민들을 설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인도네시아를 32년이나 이끌고 있는 철옹성의 수하르토정권도 최근 경제
위기로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수하르토족벌체계를 떠받치고 있던 트리 수트리스노 부통령에게 각료들의
사퇴압력이 빗발치고 있다.

이는 결국 수하르토에 대한 간접적인 불만의 표현이다.

집권 골카르당내에도 내홍의 기미가 엿보인다.

각료들은 IMF가 긴축재정을 강요할 경우 어느 부처의 예산을 줄일 것인가를
둘러싸고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수하르토의 지지자들이었던 재벌기업들도 재산을 외국으로 돌리고 있다.

수하르토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친딸로 골카르내에서 정치수업중인 시티
하르디얀티다.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경제불안이 계속되면 그녀로의 "질서있는 정권
이양"은 어려워지고 수하르토의 말년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도 상황이 좋지는 않다.

그동안 경제치적으로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총리였지만 통화위기의 배경에 유태인들의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등 계속 자충수를 둬 왔다.

특정인종을 지칭한 발언은 국제사회의 비난으로 이어졌고 결국 마하티르는
자신의 뜻이 잘못 전달됐다는 말을 남기고 장막뒤로 숨여야 했다.

경제계는 그가 지나치게 반서방적인 발언을 일삼아 나라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이에반해 2인자 안와르 이브라힘는 소리소문없이 인기를 끌고 있다.

"마하티르가 업질러 놓으면 안와르가 주어담는"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안와르에게 정권이 넘어갈 때가 됐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의 라모스는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헌법개정을 통한 대통령재선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으나 이제는 완전히 레임덕(정권말기의 통치력약화)에
빠져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경제난에 대해 아무런 처방전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박재림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