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문과 재주를 높이 사 집현전 학사로 발탁해 들인다.
그래서 정9품 정자로부터 벼슬을 시작하는데 이때 이미 동갑의 박팽년은
2년전에 1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다시 2년뒤인 세종 20년(1438)에 22세로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으로
들어온 동갑의 신숙주와 하위지및 한살 아래인 성삼문과 함께 진관사 장의사
등 한적한 절에서 독서와 저술 등 학문 연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이에 그가 25세 되던 해인 세종 23년(1441) 9월 29일에는 세종이 집현전
부수찬(종6품)이던 박팽년과 저작랑(정8품)이 된 이개 등에게 "명황계감"을
편찬하도록 명령한다.
이들의 실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공로로 이개는 세종 25년 (1443)에 박사(정7품)가 되었으니 이 해 10월
27일에 세종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의논할 때 이개는 박사의 자격으로 이에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한다.
세종이 전품을 5등급으로 나누고 연황을 9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이개 등은 연황을 9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니
3등급 혹은 5등급으로 나누되 차차 풍년 든 해를 기다려 서서히 시행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때까지는 나라에서 필요한 물건 등을 소용이 닿는 대로 그때마다 백성들
에게 거둬들여 쓰는, 없어지는데 따라 없는 만큼 공급한다는 의미의
수손급손의 소박한 현물세제를 지켜 오고 있었는데, 이제는 매년 정기적으로
그 값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도록 하되 토지의 비옥도와 그 해 흉풍의 작황에
따라 그 액수를 제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토지의 비옥도를 조사 결정하기 위해 11월 13일에는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진양대군을 도제조로 삼고 좌찬성 하연(1376~1453)과
호조판서 박종우(?~1464), 지중추원사 정인지를 제조로 삼는다.
이해 12월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28자를 손수 창제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세종 26년(1444) 갑자 2월 16일에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에게 훈민정음으로 "고금운회거요" 30권을 번역하게
하니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최초의 번역작업이었다.
그러자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정3품.당상관) 최만리, 직제학(정3품.
당하관) 신석조(1407~59), 직전(종3품) 김문(?~1448),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1417~75) 등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맹렬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세종대왕은 이들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다음날 풀어준다.
그러나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필요성을 이들에게 설명하면서 "삼강행실"
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두 쉽게
깨우쳐서 반드시 충신 효부 열부가 많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하자, 정창손이
나서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반포한 뒤에 충신 효자 열녀들이 나온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질 여하에 있을
뿐인데 하필 언문으로 이를 번역한 뒤에라야 사람들이 본받겠습니까 라고
저다운 반론을 제기한다.
이에 대로한 세종은 이 어찌 이치를 안다는 선비이겠느냐고 꾸짖고
정창손만을 파직시킨다.
세종대왕은 이 해 1월 27일에 청주와 목천 전의에서 호초맛이 나는 물이
나오는데 여러 병을 낫게 한다는 보고를 받고 눈병 치료를 위해 이곳으로
행행하고자 하여 내섬시윤 김완지를 청주로 보내어 청주에 행궁을 짓도록
하고 2월 2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3월 2일 초수리에 이르러 눈을 씻고
목욕하는 치료를 계속하였는데 자못 효험이 있었다.
이에 3월 12일에는 예조판서 김종서가 초수리 행재소로 달려와 초수의
용출은 당 태종때 예천의 용출과 같은 경사이니 백관이 하례를 드리고자
한다고 하지만 세종은 이를 고사한다.
드디어 4월 22일에는 좌찬성 하연이 예천시를 지어 하례하자 안평대군을
비롯한 호종제신들이 모두 이에 화답하니 이개도 이때 이를 지었을 터이나
남겨져 있지 않고 박팽년의 시와 신숙주의 시를 그 문집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세종은 5월 1일에 초수리 행차로 부근 농지가 길로 변하여 백성들의
농사를 망친 것을 보상하라는 명령을 내려 백성들을 아끼는 성군으로서의
자상한 면모를 보이는데 논은 마지기당 쌀 닷말, 밭은 마지기당 콩 닷말로
보상하게 한다.
그리고 5월 3일에는 초수리를 떠나서 5월 7일에 경복궁으로 환궁한다.
이 행차에 이개는 안평대군 박팽년 등과 함께 계속 호종하여 따라다녔다.
이때 이개의 셋째 숙부인 이계전은 집현전 직전으로 있어서 이개 집안
에서는 숙질이 집현전 학사로 함께 있는 영광을 누렸다.
그래서 세종 27년(1445) 을축 2월 22일에 직집현전 이계전은 왕명을 받들어
세종의 장모인 삼한국대부인 죽계 안씨의 묘지명을 짓게 된다.
이 공로로 이계전은 집현전 직제학으로 오르고 5월 1일에는 이개의 둘쨋댁
여섯째 당숙인 이숙치가 좌참찬에 오르고 7월 1일에는 큰댁 넷째 당숙인
이맹진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며 11일에는 둘째 숙부 이계진이 경상도
도관찰사가 된다.
이개 집안의 영화가 극에 이르던 시기이다.
세종 28년(1446) 병인은 이개가 30세 되던 해이다.
이해 3월 24일에 왕비 소현왕후 청송심씨가 돌아가는데, 이개의 당숙인
좌참찬 이숙치도 5월 14일에 57세로 돌아가서 이개 집안의 영화에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이숙치는 처사가 정밀하고 자상하여 세번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였으므로
매사에 실패하는 일이 드물어서 당대의 인물로 손꼽혔는데 다만 상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시비를 가리지 않고 추종한 것이 흠집이었다고 실록의
인물평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성품이 유약하여 평생 부인의 압제를 받았으므로 비록 병환중이라도
여종의 약시중을 받지 못할 지경이어서 자식이 없었다 한다.
이해 8월 29일에는 이개의 첫째 매부인 이휘의 부친 중추원사 이사검도
돌아간다.
이해 9월에 이미 3년전인 세종 25년(1443) 12월에 세종대왕이 친히 창제
하고 그동안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 보완하게 하여 완벽을
기한 훈민정음을 일반에 반포하게 되는데, 이때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 신숙주, 수찬 성삼문, 돈녕주부 강희안, 집현전 부수찬 이개 이선로
등으로 하여금 그 해석과 범례를 상세히 서술한 해례본을 지어 반포하게
한다.
간송미술관에 비장된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이 바로 이때 처음 간행
반포된 그 원본 중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이해 세종은 소헌왕후가 돌아가자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불교에 깊이 귀의
하여 성대한 불사로 추선공양을 자주 봉행하게 된다.
그러자 10월 4일 의정부에서 우참찬 정창손이 이의 중지를 청하고 나서면서
10월 6일에는 사헌부 장령 강진이 다시 이의 중지를 청하고 10월 9일에는
사간원에서 다시 들고 일어난다.
이에 대로한 세종은 사간원 관원들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고 언문으로
그들의 죄목을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는 강경대응을 한다.
이에 10월 10일 집현전에서는 직제학 이계전, 응교 최항 어효첨(1405~75),
교리 박팽년, 수찬 성삼문, 부수찬 이개 이예(1419~80), 박사 서거정(1420~
88) 한혁 유성원, 저작 이극감(1427~65)이 함께 대간은 임금의 이목인데
국사를 말한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이를 처벌한다면 언로가 막히게 되니 그
죄를 용서하라고 간청한다.
이계전과 이개가 숙질간이고 이계전과 서거정은 이종사촌 사이였는데
이들이 이런 아름다운 일에 뜻을 같이 하였으니 얼마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였겠는가.
이때 수양대군이 이들의 친구로서 거중조정을 잘 하여 세종의 노여움을
푸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세종 29년(1447)은 이개가 31세되는 해인데 이 해 4월 20일밤에 안평대군은
도원에서 박팽년과 함께 노니는 꿈을 꾸고 이를 안견에게 말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다음 자신이 직접 기문을 짓고 박팽년으로 하여금
그 서문을 짓게 한다.
그리고나서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을 비롯하여 하연 김종서 등 당대
명공거장들로 하여금 그 제화시를 짓게 하니 한권의 거대한 시화축이 되었다.
거기에 이개의 시가 빠질리 없다.
그래서 현재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 속에서 그의
친필 시를 찾을 수 있으니 당대에 제일 맑고 빼어났었다는 그의 시와 글씨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오직 이것 뿐이다.
이계전을 비롯하여 여러 숙부들이 살아남고 "사가집" 61권을 남긴 서거정이
그를 존경한 인척이건만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그의 문적이 인멸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몽유도원도"의 제화시를 보면 글씨는 송설체의 진수를 터득하여 수려한
필치가 안평대군과 가장 방불하고 시의 또한 청고하니 그 시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지워 맑고 높으면 도가 절로 더해져, 초연히 세상밖 신선세계 꿈에서
보네.
안개 노을 가득한 골짜기 꽃이 피고 지는데, 대숲 나무숲 깊어 길은 있으나
마나.
단사(수은과 유황의 혼합물로 신선되는 약이라 함)로 능히 뼈를 바꾼다
어지럽게 얘기하지만, 어찌 대낮에 억지로 병을 걸어 두겠나.
[갈홍의 "신선전" 권5 호공전에 의하면 호공이란 신선은 저자에서 약을
팔다가 날이 저물면 옥상에 걸어 둔 빈병(공호)으로 뛰어들어가 쉬었는데
그 병속은 신선세계였다 한다]
그림 펴놓고 생각으로 신선세계 노닐어 보나, 내 마음 때끼고 행적은 더욱
거칠어 부끄럽기만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