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29일 정부에 한은특융 등 비상대책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경기침체
가 지금처럼 계속 된다면 내년에는 사업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에 따른 것이다.

당장 1달러당 8백90~9백30원대로 예상해 짜놓은 내년도 환율전망은 수정
해야할 형편이다.

또 주식 등 직접금융시장의 불안이 계속되는 한 자금조달계획은 입안자체가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그나마 최소한으로 잡은 투자 규모의 축소 조정도 불가피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적인 경쟁력 강화기반 조성을 위한 연구개발투자 등이
축소될 것은 불보듯 뻔해진다.

투자가 없으니 경기회복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동안 통화위기를 겪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실물경제 기반이
비교적 튼튼하다며 위안을 삼아온 전제가 깨지게 된다는 얘기다.

이날 기조실장 회의에서 정부에 대한 성토가 어느 때 보다도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동안 한보부도 사태이후 기업의 구조조정을 돕기 보다는 신대기업정책의
실시를 예고하며 기업의 자금조달난을 가중시킨 정부가 금융위기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던 것이다.

전경련 관계자도 "정책실패의 책임회피용으로 기업의 "잘못"을 먼저 내세운
것이 돈의 회전을 가로막는 등 금융불안의 불씨를 제공했다"며 이번에도
실기하면 불황은 복합화, 장기화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재계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돈 줄"이다.

현재의 상황은 부도를 면하기 위한 급전은 물론 견실한 기업의 정상적인
투자를 위한 재원마저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란게 기조실장들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자금조달의 숨통을 더 이상 정부에만 맡길 수 없다며 우선 자기신용있는
기업에게 만이라도 해외자본조달 문호를 개방해 달라는 요구가 나올만
하다는 말이다.

모그룹 기조실장은 "이미 외국기업들이 "구제" 차원에서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이런 상태를 방치할 경우
국내 산업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재계가 이날 우는 소리만 한 것은 아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업은 더욱 구조조정과 경영혁신활동에 박차를 가해
불황에도 흔들리지 않은 튼튼한 성장기반을 갖추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대기업그룹을 중심으로 실행되고 있는 만큼
경제회복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경제정책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정부
에도 정책실시의 결단을 촉구하는 몸짓이었던 셈이다.

이날 기조실장 회의의 분위기는 그러나 올들어 어느 때 보다도 무거웠다는
것이 전경련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정부가 "이런 조치만 해주면 된다"는 식의 논의 보다는 "정부가 이미
실기해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체념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위기상황에서도 금융안정책의 폭과 집행시기를 머뭇거리고 있는 정부에
재계의 주장이 어느 정도 먹혀들지 주목된다.

<권영설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