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지난달 30일 ING베어링증권 서울지점에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매매가 뜸하던 영국의 한 지방교원공제회가 "한국전력 주식 10여만주를
매도해달라"는 주문을 낸 것이다.

그런데 이 주문에는 특이한 조건이 붙었다.

CD(Careful Discretion)라는 조건으로 가격은 아무래도 좋으니 시장상황을
봐가며 조금씩 나눠서 팔라는 주문이다.

통상 팔때 하한선과 살때 상한선을 정해두는 리미트주문(Limit Order)과는
다른 양상이다.

게다가 이 외국인은 단주까지 처분해달라고 주문했다.

보유중인 주식을 전량 처분하겠다는 얘기였다.

장기투자를 주로하는 외국의 연기금펀드(Pention Fund)가 매도공세에 나선
것은 ING베어링증권 창구뿐만 아니다.

외국인 매도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HG아시아증권 서울지점창구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30일 하루에만 7백여건에 달하는 외국인 매도주문을 받았다.

이 가운데 절반정도가 좀처럼 매도를 하지 않았던 연기금펀드였다"
(HG아시아증권 임원)

연기금펀드는 한번 투자를 하면 보통 4~5년동안 보유는 장기투자자다.

그런 장기투자자가 매도공세를 벌이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ING베어링증권 강헌구 이사는 "연기금펀드는 투자에 대한 의사결정이
더디다.

대형연기금들이 환율과 주가추이를 살펴보다 뒤늦게 매도결정을 내린 것
같다.

외국인 매도가 사상최대치를 기록한 것도 연기금의 매도 탓이다"고 말했다.

지난 9월말 현재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는 국내주식은 14조1천9백86억원어치.

이 가운데 연기금펀드의 비중은 10.6%인 1조5천62억원이다.

물론 뮤추얼펀드(Mutual Fund)인 투자회사가 59.0%인 8조3천7백68억원어치로
가장 많고 은행(18.8%) 보험(2.2%) 증권(1.9%)순이다.

그러나 연기금펀드가 뮤추얼펀드나 은행보다 비중은 작지만 장기투자자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크다.

뮤추얼펀드나 단기차익을 노리는 퀀텀펀드 타이거펀드 등 헤지펀드(Hedge
Fund)는 한국시장에서 손을 뺀지 오래다.

자딘플레밍증권 서울지점의 한 관계자는 "핫머니적인 성격을 지니는 헤지
펀드는 종합주가지수 700선이 깨지던 지난 9월중에 이미 한국주식을 대량
처분했다"고 전한다.

연기금펀드가 떠나고 있는 것은 미국계나 영국계 투자자들의 매도규모가
크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다.

9, 10월 두달동안 국가별로 구분없이 무차별적인 매도세를 벌였지만 장기
투자자로 알려진 미국과 영국의 매도세가 두드러진다.

증권감독원에 따르면 미국계 투자자들은 10월한달동안 한국주식을 2천94억원
어치나 줄였다.

단타매매성격을 짙은 말레이시아계가 순매도규모를 16억원으로 줄였을뿐
영국계나 아일랜드계 뉴질랜드계 등이 모두 적게는 3백억원 많게는 2천억원
어치 가까이 순매도했다.

문제는 장기투자자인 연기금이 한국시장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다.

환율이 안정되고 자금시장이 제대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한국시장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기까지는 아무리 빨리잡아도 6개월은 걸린다는게 외국계 증권사
들의 얘기다.

이런 점에서 떠나가는 외국인의 발길을 되돌려 놓기위해서는 장기투자자들이
발붙일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마련하는게 선결과제임에 틀림없다.

환율안정 못지 않는 정책적인 과제다.

< 최명수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