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밝은 태양 아래서 박광석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면 좀 더 확실한 분석이 될 것 같다.

물론 10년동안 보아온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한번도 그를 남자로 본 적은 없었다.

민박사로 꽉 찬 가슴속에 누가 들어올 틈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박광석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해마다 보내와도 자기네 약을
많이 팔아달라는 정도로만 알고 그의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어느해 크리스마스에는 그가 초대권 두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

무슨 국제음악제 표였는데 그것을 미아와 미경이에게 주고 자기는
민박사와 전화로 정담을 나누는 크리스마스를 보냈었다.

박광석은 처음 공박사를 만난 순간,그녀의 찬바람 도는 냉정함과
조용함에 마음을 송두리째 뺏겨버렸었다.

그는 늘 공인수를 닮은 그런 차가운 형의 여자에게 끌렸다.

자신이 좀 어눌하고 허둥거리기 때문에 똑 떨어지는 그런 여자가 정말
마음에 든다.

그는 능청스럽게 기회만 있으면 그녀를 끌어내려고 시도했지만 한번도
그의 진실을 받아주지 않았다.

좀 못 생긴 편에 키만 큰 그는 오밀조밀하게 잘 다듬어진 미남인
민박사에 비하면 백조와 오리새끼 같다.

그래도 그는 욕심과 집념이 대단한 끈덕진 사내였다.

박광석은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공박사의 집 지하실에 그녀의 차를
넣은후 병원으로 올라간다.

흰 가운을 단정히 입은 공박사를 보니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어젯밤 입술을 물어버린 공박사는 거기에 없고, 웬 냉정하고 차분한
흰 빛깔의 여의사가 앉아 있다.

"커피 드세요. 헤즐러를 좋아한다고 했지요?"

"네, 박사님이 좋아하는 것이면 다 좋습니다.

저는 부창부수라는 말을 신봉합니다.

헤즐러를 좋아하시면 저도 헤즐러를 좋아하게 될 겁니다.

사실 저는 엽전이 돼서요.

커피의 맛을 잘 몰라요.

구수한 숭늉이 제일이지요.

하하하"

그는 정말 헤즐러 커피 한봉을 사들고 왔다.

"이것 맞지요? 좋아하신다기에 사왔습니다"

"커피를 마시러 오라고 했지, 누가 사오랬어요? 아이 참, 너무 웃기네요.

진작 그런 분인 줄 알았으면 빨리 사귈걸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박사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더 기다릴 수 있어요.

그리고 아직 총각인걸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싱글입지요"

그녀는 그가 자기 때문에 결혼이 늦었다고 우기는 것 같아서 우스워졌다.

"사실 저는 공박사님을 꼭 닮은 여자가 아니면 결혼 안 하려고 이렇게
늦은 걸요.

꼭 의사래야 되구요.

공박사님처럼 맑고 차갑고 쌀쌀맞은 여자가 제 와이프로 안성맞춤이라고
굳게 믿고, 나이 사십이 돼가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를 구해주신다면 얼른 공박사님을 끌어안고 이번에는
귀를 물겠습니다"

"무셔라, 타이슨이 서울에도 있군요.

호호호호, 미쳐버린 타이슨은 정말 곤란하다, 치료를 받으실까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