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은 인간학입니다"

이화여대 학관 414호.

3백여석의 교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강단에는 수더분한 "아줌마" 한명.

여성학 강의로 이름을 떨치는 장필화(47)교수는 언제나 이 한마디로
수업의 포문을 연다.

여성학? 남성학은 없는데 웬 유난? 시집도 못갈 드센 "계집애들"의
시답잖은 꿍꿍이?

가시돋친 세상의 수군거림에 대해 장교수는 이렇게 일갈한다.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학문에다 뭐하러 남성이란 수식어를
붙인답디까"

''HISTORY (his + story)''.

일상 언어에서조차 인간이 살아온 흔적인 "역사"가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못박는다.

젊고 건강한 남성이 인간의 전형으로 굳어진 명백한 증거.

그 세상에서 노인, 장애인, 그리고 여자는 "보통사람"의 범주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여성학은 바로 이처럼 일그러진 사회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찍는 학문이다.

여성의 눈으로 철학 사회학 정치학등 학문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남성중심
세계관에 가차없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자는 것.

하지만 학기초에 학생들은 "여성해방"이란 단어에 그저 덤덤할 뿐이다.

별다른 차별을 못 느끼고 자라난 신세대 딸들.

"요즘 여학생치고 공주아닌 학생 없다"는 게 장교수의 말이다.

"예쁜딸"로 태어나 갖은 대접받고 귀하게 자라난 통에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은 강건너 불일 뿐이다.

"답답하지요.

딸에서 아내로 또 어머니로 변신하는 순간 공주는 순식간에 상궁쯤으로
강등당하고 마는 걸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설혹 남의 일이라 해도 같은 여성, 우리 모두의 일로 나누고 껴안을 수
있어야 할텐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의 기운이 감지된다.

"여러분의 어머니들이 정말 갈비를 진짜 딱 두점만 먹으면 배가 부를까요?

살이 통토옹~한 가운데 토막보다 생선머리를 좋아하실까요?"

당연히 희생하는 존재였던 어머니를 떠올리는 학생들의 눈빛이 이내
달라진다.

모성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고 포장되면 "나"는 없어지고 "어머니"만 남는
현실.

제2의 성으로 살아가는 여성들.

특히 한국여성들.

아버지들이라고 행복할리 없다.

불행한 어머니와 고개숙인 아버지는 동전의 양면이니까.

문제는 각본 깨뜨리기다.

백일날 남자아기에겐 파란색, 여자아기에겐 분홍색 옷이 쏟아져
들어오면서부터 성각본은 시작된다.

"여성답게" "남성답게"는 가히 신성불가침의 절대진리다.

이 지독한 고정관념을 부수는 게 장교수의 일차 과제다.

"남자가 울면 뭐가 떨어진다고요?

절대 안떨어집니다.

데이트후에 여러분들이 남자친구를 집까지 바래다 주면 입에 가시가
돋치던가요?"

연달아 던져대는 객적은 질문에 학생들에게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나온다"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르는 욕망에 K는 H에게 덮쳐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칩시다.

여기서 K는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물론 99.9%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당연히 덮친 쪽은 남성.

깔린 쪽은 여성이고말고.

"선생님 어떻게 여자가..."

말을 채 다하지도 못하고 머뭇댄다.

"그게 바로 우리가 철저히 길들여져온 성각본입니다"

여성다움과 남성다움.

이 철칙이 얼마나 사람을 구속하는가.

"남성들도 마찬가지예요.

정작 바퀴벌레를 끔찍히 싫어하는데도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은척 바퀴벌레를 잡아야 하는게 괴롭다는 상담도 많이 받습니다"

따라서 여성해방은 바로 인간해방으로 통한다는 게 장교수의 열변.

서로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학생들은 담대함을 배운다.

한학기가 끝날 즈음엔 학생들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다.

당당한 여성, 삶의 주체라는 새롭고 벅찬 각성을 안은 학생들을 볼때마다
밀려드는 뿌듯함, 하지만 그 뒤엔 한자락 아픔이 남는다.

개인의 의지만으론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장벽에 부딪힐때 그들의 가슴엔
또다른 좌절이 깊게 패일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래도 지치지는 않는다.

언젠가, 아주 언젠가는 우리의 딸, 그리고 우리의 아들이 나란히 마주본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일구어가는 날이
오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장교수는 오늘도 목에 잔뜩 힘을 준다.

"여성학은 바로 인간학입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