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인사철을 앞두고 기업 임원들이 떨고 있다.

정기인사철이면 늘상 있는 일이라지만 올해는 그 차원이 다르다.

지난해만해도 "솎아내기" 정도였던 기업 임원인사가 올해는 아예
"대학살"로 번질 것이라는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황의 골이 워낙 깊다보니 올해 각 기업들의 경영실적은 아예 기대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그나마 실적이 좋다는 기업들도 불황을 구조조정의 계기로 삼고 있다.

그 구조조정 대상의 1순위가 임원들이다보니 인사일정을 두달가량 남겨놓은
기업에서도 "누가누가 대상이고 누구는 벌써 통보를 받았다더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고 있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임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좌불안석이다.

지난해 연말인사때 임원반열에 오른 신참들마저 가끔씩 목덜미를 쓸어내릴
정도다.

"승진은 꿈도 꾸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일이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게
대부분 임원들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지난 3년간 매년 10% 가량의 임원을 잘라내온 삼성그룹은 "올해는 단위
자체가 다르다"고 말한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단위 자체가 다르다는 의미는 적어도 20%는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얘기인 것 같다.

현대그룹의 경우 현대자동차가 약 20%의 임원을 내보내기로 하고 대상자
선정에 들어갔다.

이미 일부는 통보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대우그룹도 임원수를 동결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올해 이사대우에 오르는
부장 숫자가 곧 퇴직해야 하는 임원 숫자와 같아지게 됐다.

다른 그룹에 비해 실적이 괜찮았다는 LG그룹 역시 실적과는 관계없이
기아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임원수를 조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분위기다.

다른 그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온정주의의 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다.

올해 임원인사가 이처럼 참혹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실적이 좋질 않다.

인사의 잣대는 결국 실적이다.

하지만 어느 기업이고 올해 실적이 좋다는 곳은 없다.

기본적으로 "대량 학살"을 뒷받침할 든든한 논리는 마련된 셈이다.

그동안 기업들이 꾸준히 추진해온 구조조정 작업은 실적 부진으로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한계사업을 정리하고 사업부를 축소하면 자연히 자리를 잃는 임원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의 일부 계열사들이 사업부를 대폭 줄이는 방향으로 조직을 다시
짜고 있는 것도 결국 임원들에게 영향이 갈수밖에 없다.

임원을 잘라내지 않기로 소문난 선경그룹조차 최근 실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일부 임원다이어트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쌍용그룹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감량이 자동차 임원들에 집중됐지만
올해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전계열사로 확산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적을 핑게로 보다 조직경쟁력을 강화에 힘쓴다는게 기업들의 생각이다.

연경화도 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이 확실하다.

삼성그룹은 올해 사장단 인사와 함께 전략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키로 했다.

그룹의 전략을 짜는 조직이다.

구성원은 나이 많은 사장급 임원이다.

일선에서 회사를 직접 경영하는 사장들은 보다 젊은층으로 가져가겠다는
복안인 셈이다.

지난해 60세 이상의 사장단을 모두 현업에서 퇴진시킨 LG그룹은 구본무
회장이 늘 강조하는 발탁인사를 강화할 예정이다.

그만큼 기존 임원의 자리를 없어진다.

현대그룹 한화그룹 등도 "임원 직급정년제"를 본격 가동할 예정이다.

이 작업은 해외경영과도 맞물린다.

대우그룹은 김우중 회장이 누차 강조했듯이 연말 인사를 통해 회장급을
비롯한 상당수의 임원들이 해외발령을 받게 된다.

기준은 50세 이상 임원이다.

본격적인 해외본사체제를 갖추기 위한 포석이지만 막상 발령 대상
임원들의 속은 좋을리가 없다.

삼성그룹도 지난해 최고경영진들을 비롯한 임원들을 해외로 보내
해외본사체제를 갖춘데 이어 올해는 전무급이상 임원의 상당수를
해외로 내보낸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올해 임원 인사에서 더욱 불행한 사람들은 부도및 한계기업의 임원들이다.

기아그룹을 비롯해 진로 해태 쌍방울 뉴코아 등의 임원들은 잘라내지
않아도 스스로 나가주는 것이 미덕이 돼버렸다.

이미 기아그룹은 임원의 3분의 1인 1백4명이 회사를 나갔다.

아직 부도는 나지 않았지만 위기에 몰린 수많은 기업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과거 같으면 임원들을 내보내도 협력업체를 만들어 준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예우를 해줬다.

그러나 이제는 기업들이 그럴 여유조차 없다.

장년의 엘리트 실업자가 양산되는 시대가 돼 버린 것이다.

< 김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