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은 피아니스트 백명우의 오랜 팬이었다.

백명우는 여섯살때 프랑스로 가서 줄곧 거기서 자라서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 한다.

김치수 회장은 백명우에게 파리유학을 한 딸을 소개시킨후 프랑스어
통역을 시킨다.

그녀는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백명우에게 신비한 매력을 느낀다.

그는 아직 독신이었고 김치수는 파리에서 그를 만난후 오랫동안 그에게
후원금을 매달 5백만불씩 부쳐주고 있었다.

백명우 최고의 후원자다.

"미스터 백, 내 외딸 영신이오. 어때요? 서로 교제해보구려. 우리 딸은
당신의 팬이기도 하지"

김치수는 백명우 정도는 돼야 자기 사위로 만족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치는 그 쇼팽의 곡에 매료되어 있어요"

영신이 조각가 사위와 맞지 않아서 이혼하는 바람에 기대를 져버렸지만
김치수 회장의 예술인을 사랑하는 기호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지금 자기의 귀한 외동딸이 골프치는 놈과 사귀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죽을 지경이다.

백명우도 처음 보는 영신에게 호감을 갖는다.

이제 40대 후반에 든 백명우도 서서히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중이다.

"다음 달에 백명우씨가 동경에서 연주회를 여는데 우리 같이 가지
않을래?"

"..."

영신의 입에서 아무 대답이 없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김치수는 약간 기분이 나빠져서 신경질적이 되어
영신을 노려본다.

그의 시선에는 푸른 빛깔의 불이 번쩍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징조다.

영신은 얼른 아버지의 기분을 무마시켜야 한다고 느끼면서 겨우, "어느
날이지요?"라고 묻는다.

"안 오셔도 됩니다. 저는 원래 여자 친구를 동행하지 않습니다.

김치수 회장님께서 특별히 동행하신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미스 김은
다른 일로 바쁘시면 안 오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귀찮을 때도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저의 동행인은 오직 어머니 뿐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염문을 퍼뜨렸던 장본인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박한
미남이었다.

길쯤한 얼굴에 단정한 코며, 부드러운 입술과 크고 서늘한 눈매며
큰 키에 잘 어울리는 길고 반듯한 목덜미의 선이 특히 잘 정돈된
호남이었다.

그리고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품이 정말 한국이 내세우는 품위 있고 절도
있는 세계적 피아니스트로서 흠잡을 데가 없다.

영신보다 두살이 아래지만 김치수 욕심에 백명우 정도면 자기가
딸 때문에 당한 망신들을 모두 한 방에 날려 버릴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