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스타가 참 많다.

스타배우 스타탤런트 스타가수 스타선수, 심지어 스타정치인.

최근 스타가 들어가는 말 하나가 새로 생겼다.

"광고스타", 몇달전만 해도 생경하던 용어였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최종원씨(49).

광고스타라는 말을 우리 주변에 가져온 장본인이다.

올 4월 출연한 OB라거광고 "간첩편".

영화배우 박중훈이 슈퍼에서 4천만이 다 아는 "(라거) 한박스"를 주문하자
세상물정 모르고 "나도 라면 한박스"라고 부르짖는 그의 연기는 "코믹연기는
바로 이런 것"임을 선언하는 소리없는 외침이었다.

광고스타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했다.

푸근하면서도 익살스런 그의 연기는 OB광고 후속편에서 광채를 더해갔다.

급기야 능률협회컨설팅과 현대리서치가 최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광고모델 선호도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모델"로 뽑혔다.

지금은 빙그레 뉴면과 고려당 광고에도 출연, 하루에도 수십번씩 우리의
안방을 찾아온다.

그는 그러나 광고스타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연극인으로 남고 싶어한다.

23년간 심신을 바쳐온 연극계.

마음의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

생활을 위해 어쩔수 없이 가난한 연극무대를 떠나 외도를 하고 있지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비장감마저
서려있다.

검은 군화에 검정바지 검정폴라, 검정조끼, 그리고 검정모자.

그는 온통 검정색 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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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 사람 = 이정훈 유통부기자 ]]


-옷차림이 "젊은 오빠" 스타일인데 어색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입고 다니는게 편합니다.

친구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옷차림이 그게 뭐냐고 핀잔을 주지만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결혼식장에도 지금처럼 입고 갑니다.

양복을 입는 때는 상가에 갈 때 뿐입니다.

슬픔을 나눌때는 예를 갖춰야 하지만 좋은 일에는 격식을 따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수입이 상당할 것 같아요.

광고출연도 잦고 TV에도 많이 나오고 있으니.

"꽤 되지요.

덕분에 올해 김포에 아파트 한채를 분양받았습니다.

50평생 처음으로 가져보는 내집입니다.

지금은 부천 중동의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고 있습니다.

몇년후면 딸이 시집갈텐데 그 때가서 사돈으로부터 "아직 그집은 집도
한칸 없느냐"라는 말을 들을 수는 없잖습니까.

작심하고 마련했습니다"

-원래 연극인이죠.

"처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연극배우입니다.

74년 서울예전 졸업후 연극을 시작해 지금까지 모두 1백6편의 연극에
출연했습니다.

1년에 4~5편이니까 상당히 많은 편이지요.

다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리어왕" "북어대가리" "색시공" "아버지바다"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영화도 몇편 했는데 "투캅스" "영원한 제국" "마누라죽이기" 등에서
조연으로 출연했어요"

-요즘은 연극에 거의 출연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연극을 안한지 1년반이 다돼갑니다.

지금은 주로 TV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연극에 발을 디딘후 생활고로 TV문학관에 몇번 출연한 것 말고는 95년까지
연극이 삶의 전부였죠.

그러다 96년에 옆길로 샜어요.

큰 딸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입학금이 없었어요.

그때 한 TV방송국에서 미니시리즈 출연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몇날며칠 고민하다가 출연키로 마음먹었습니다.

연극인의 길도 소중하지만 아버지의 길도 중요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자녀들도 연극의 길로 들어섰다고 들었습니다.

"딸만 둘인데 둘다 서울예전 연극연기과에 재학중입니다.

2학년, 1학년입니다.

3부녀가 동문이지요.

애들이 졸업하면 3부녀가 함께 연극에 출연하는게 큰 꿈입니다"

-연극을 하게 된 계기는.

"고향(강원도 태백)에서 67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뒤 1년쯤 그곳에
머물다 서울로 올라와 2년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 친구들은 아주 조그만 일에도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을 봤습니다.

고향의 탄광촌이어서 광산사고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봐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서울 친구들이 하찮은 일로 힘들어하고 좌절하는 것을 보고 서울이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보따리를 싸고 고향으로 내려가려는데 당시 서라벌예대에 다니던
누님이 연극을 한번 해보라고 권유해 서울예전에 들어갔습니다"

-연극의 매력은.

"연극에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아요.

영화나 TV에서는 잘못하면 다시 찍으면 되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대에서 실수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관객들에게 다시 보여줄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온몸을 바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만큼 치열하고 열정적인 예술이죠"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때는.

"95년 4월이었습니다.

그달 2일 영화 "영원한제국"으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타고 5일에 부모님의
결혼 69주년잔치를 열어드렸을때 정말 기뻤습니다.

부모님 연세가 지금 89, 88세입니다.

부모님은 그동안 회갑 진갑 칠순잔치 하나 하시지 않았어요.

지난 65년 제가 고2때 둘째 형이 광산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무슨 염치로 잔치를 하느냐는게 당신들의 마음
이었습니다.

결혼 69주년이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잔치는 열어드려야겠고 그래서
그냥 갖다부친 구실이었어요"

-OB라거 광고에 출연하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특별한 사연은 없습니다.

당초 작년말에 광고모델 제의를 받았는데 그때는 바빠서 못했다가 올초에
출연하게 됐죠.

여러편의 영화에서 공연한 박중훈씨가 추천했는데 광고회사와 광고주 모두
좋다고 했다고 합니다.

광고회사 얘기로는 제가 술이미지에 꼭 들어맞는다나요"

-앞으로 계획은.

"오래전부터 한 1년간 외국에 나가 연기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 50이 되기전에는 결단을 내릴 작정이었죠.

그런데 아직은 제가 1년쯤 돈을 벌지 않아도 가족이 살만한 수준이 되지
않았습니다.

2년후에는 그렇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공부를 한뒤 돌아와 대학교에 출강도 하면서 연극세계에 더 깊이 들어갈
생각입니다"

자리를 같이 한지 1시간여만에 선약 때문에 일어서야겠다는 그는 "생활신조
라고 할 것은 못되지만 재미있고 신나게 일하자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갖고 있는 능력도 작은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일하면 그 조그만 능력도 제대로 발휘할수 없습니다"

<이정훈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