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는 여성작가 두사람의 장편소설이 나란히 출간됐다.

안혜숙(52)씨의 "다리위의 사람들" (찬섬)과 김이소(41)씨의
"작별인사" (민음사).

이들 작품에는 3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극과 그리움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한 여자의 절망적 사랑이 각각 그려져 있다.

안혜숙씨의 "다리위의 사람들"은 분단으로 기구한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한 가족의 아픔을 담았다.

미술교사인 석훈은 어느날 청주교도소로부터 날아온 외할머니 정금분의
편지를 받고 집안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간다.

실타래처럼 얽힌 비극은 6.25직후부터 시작된다.

충직하던 머슴 만복에 의해 외할아버지가 살해당하자 갈곳 없는
외할머니는 어쩔수 없이 만복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고 산다.

결혼한 뒤 친정에 들렀던 어머니는 지갑을 뒤지던 만복에게 겁탈당하고
이를 발견한 외할머니가 만복을 죽이면서 비극은 증폭된다.

절망에 빠진 어머니는 자살을 기도하다 스님에게 구출돼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아가지만 만복의 아이를 가진 걸 알고는 몸부림친다.

그 아들이 곧 석훈이다.

그런줄 모르고 자신을 한번도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갈등하던 석훈은 외할머니의 편지를 계기로 출생의 사연을
조금씩 벗겨가지만 비밀을 다 밝히지 못한채 자신이 꿈꾸던 그림을
혼신으로 완성한 직후 갑작스레 죽음을 맞는다.

이로써 어머니는 다시 한번 씻을수 없는 한을 떠안게 된다.

작가는 미로를 찾는 듯한 접근방식과 절제된 감정묘사로 거대한 비극을
담담하게 어루만진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래윗세대의 운명이 석훈의 "추"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설정도 작가의 숨은 배려.

집안의 내력을 하나하나 더듬는 일은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통해 막다른
집에 다다르는 과정과 닮았다.

그곳에서 만난 집은 아직 미완성이고, 그래서 살아남은 두 어머니는
더 큰 용서와 화해의 집을 준비한다.

김이소씨의 "작별인사"에는 이렇다할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이 없다.

낮은 독백이 이어지는 소극장의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킨다.

물놀이 도중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쌍둥이오빠를 잃고 혼자 살아난
"나"는 오빠를 닮은 옆집 남자아이에게 집착한다.

오빠가 나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나는 석유파동으로
집안이 갑자기 기울자 그애와 작별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뒤 몸과 마음에
병을 키운다.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과 숨이 막힐
것같은 그리움에 힘겨워하며 "여자"가 된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15년 전의 그집 앞에 도착한다.

그집을 두번째 찾아간 날 나는 쓰러지고 나를 알아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이 소설은 줄거리보다 독특한 묘사법으로 눈길을 모은다.

작가는 소단락 첫머리마다 "나는 전봇대 앞에 서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거나, "소리가 들린다. 구급차의 사이렌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등의 반복어법을 자주 쓴다.

동일한 표현이 일정 간격 반복되는 수사법은 폐쇄된 일상의 틀을
강조하는 독특한 기법.문장에도 과거형이 없다.

현재 진행형만 있다.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면서 언제나 "지금 이 자리"의 아픔을 얘기한다.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커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
한 인간의 절망감"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도 "절망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그리움의 연속성"과 맞닿아 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