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정책자문가들의 권한과 책임이 모호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이 야기되어서 의견수렴이 지연되는 일이 지나치게 빈번하다.

경제정책에 대해서 자문 또는 건의를 하는 학자들의 기본자세는 어디까지
나 가치 중립적이어야 한다.

즉 일정한 정책의 채택으로 예상되는 효과와 비용을 분석하여 제시하는
역할에 그쳐야 할 뿐, 특정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관적 견해의 표명은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정책대안중에서 선택하는 것은 이미 가치중립의 범위를
넘어서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며, 이는 학문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경제이론가들이 여러 정책대안에 따른 비용과 편익을 사전적
으로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다면 그들이 의식적으로 특정정책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이미 주장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진다.

예를 들어 물가안정시책이 갖는 긍정적 효과들(서민생활의 안정, 투기근절,
저축증대와 금리인하, 자원배분의 효율증대)과 부정적인 효과들(기업활동
위축, 성장둔화, 실업증가)이 장단기에 걸쳐서 계량적으로 분석되어 비용
보다는 편익이 크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면 안정시책이 채택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의 소지는 있겠지만 이는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에 정책결정자의 가치판단과 여론의 향배에 의해서 좌우되게
마련이다.

즉 통화긴축을 찬성하는 서민대중과 반대하는 기업가들간의 역학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경제이론은 그동안의 괄목할만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복잡다기
한 현실을 명쾌하게 해부하여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기에는 아직도 역부족
이다.

연간 1백%를 초과하는 물가상승의 폐해는 분명하지만 인플레율 3%와 6%가
각각 갖는 폐해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이 별로 할
말이 없다.

더욱이 정책결정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통화긴축에 따른 물가안정과 성장
둔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나타나느냐인데, 이에 대해서는 정교한
시계열모형도 신뢰성있는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정책논쟁에는 항상 가치판단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물가안정없이는 지속적 성장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모든 이론을 동원해서 성장론자들을 공격하고, 역으로
성장이야말로 서민생활의 향상을 가져오는 첩경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긴축의
폐해를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학자들이 정책논쟁에 임하는 자세는 논리적 근거와 객관적 분석을 제시
하는 데에 치중하고, 주관적 가치판단은 최대한으로 자제해야만 논쟁과정이
생산적이 된다.

상식수준 정도의 경제지식을 가지고 피상적으로 경제를 보는 일반대중과,
과중한 일상업무에 쫓긴 나머지 깊이있는 공부를 하기 어려운 정책결정자들
에게 이론적 혜안과 실증적 검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학자들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학기술을 흔히 기초기술과 응용기술로 구분하고 대학은
기초기술연구, 기업은 응용기술연구로 분업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회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정책결정자들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론연구가 활성화되어 현실
경제에 대한 설명력과 예측력을 높여나가야 되는 것이다.

학자는 고집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학문적 원칙을 고수하고 세속에 흔들리지 않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자세, 즉 곡필아세하지 않는 태도를 지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책건의에 이르러서는 아집에 가까운 고집은 오히려 정책결정을
오도할 위험성이 크다.

왜냐하면 정책을 현실에 맞추어야지 현실을 정책에 억지로 끼워맞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정책건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외국의 사례를 원용하는 일이 잦다.

이 경우 자기 입맛에 맞는 사례만 골라서 인용하는 것은 당연히 억제되어
야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경계해야 할 것은 정책이 갖는 역사성을 무시
하고 여과없이 이식하려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서 물가안정을 위한 중앙은행독립과 관련해서 전후 서독의
사례를 드는데, 서독은 잘 알다시피 가히 재앙에 가까운 인플레를 겪어 온
국민들이 물가안정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나라이지만, 우리는 그 정도로
살인적인 물가급등을 경험하지는 않았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정책논쟁은 그 줄기가 시장원리에 어느정도 맡길 것인가에
모아지고 있다.

여론의 변덕스러움을 감안하더라도 경제운용을 시장원리에 일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더니, 기아문제의 파급이 커지니까 정부가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인들은 어차피 "여론 따라 강남간다"고 치고, 학자들은 시장의 특성과
한계에 대해서 실증적 지식을 개진하는 것이 책임있는 태도다.

시장자율조정기능을 신뢰하고 시장기능의 강인함을 믿는 사람과 시장의
한계에 무게를 두는 사람간에는 의견일치를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것이
주관적 신념의 주장에만 그쳐서는 아니되며 시장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시장에 참여하는 경제주체들의 의식가치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