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은 그날밤 결국 지영웅에게 가지 않았다.

그것은 살을 깎는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가 만약 프로를 따지 못한다면 백명우와의 결혼이 무산될 수도 있고
김치수는 상당히 난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영웅이 프로를 딴다면 그는 이미지관리를 위해서라도
좀 더 신중한 처신을 할 것이며, 그를 사랑하는 알맞은 나이의 다른 여자와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가는 것이다.

참자. 쾌락이 내일의 승리에 방해가 되고 그 뒤에 오는 허무의 심연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지코치를 끝까지 선택하지 못하는 데에는 자기 나름의 철학도
한 몫을 차지한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서로 이상적이더라도 육체는 늙는 것이며 사랑의
가변성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경험해왔다.

태양이 지듯이 인간의 사랑은 검게 퇴색하고 만다.

영혼의 내부가 무척 냉정한 영신은 최고의 결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결혼을 원한다.

상식적이고 과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평범한, 가장 부드럽되 넘치지
않는 소탈한 결혼을 그녀는 원해왔다.

그는 남편이었던 윤효상이 이혼을 하자 마자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여교수이고 유명한 TV 사회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정중한 결혼카드와 선물을 보냈다.

아버지와 상의해서 결혼 축의금으로 1천만원을 보냈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돈으로 정한 것이다.

윤효상이 만약 폭행이나 소송을 하지 않고 점잖게 그녀를 놓아주었다면
아마도 그 축의금의 액수는 1억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부족한대로 자기와 거의 15년이상 결혼생활을 해온 윤효상에게
무엇인가 인생의 새출발을 돕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두 부녀가 똑같이 생각하고 결정한 결혼 축의금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살기 위해서 아버지가 열심히 번 재산을
행복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썼다.

영신과 김치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많은 자선사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 부녀는 천성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어느날 아침 김영신이 사무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을때 결혼 1주년
기념일을 맞는 윤효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실수도 잘 저지르지만 자기의 진심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마음이
여린 남자이기도 했다.

미스 리 문제가 끝까지 그의 양심속에 큰 죄로 남아 있지만 그래서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미스 리 가족들에게 일생동안 선심을 베풀 것이다.

"김영신, 내가 평생을 바쳐서 사랑해도 모자랄 여자 당신은 정말
나에게 수호천사 같은 마음의 연인이오"

그는 그녀가 자기의 폭력에 아무 반항없이 고스란히 맞아준 그 사실을
늘 가슴 깊이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