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46) 단계 하위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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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0년(1438) 4월11일 하위지가 장원급제하면서 올린 대책문 파동이
결국 영의정 황희까지 사직소를 올리게 하고 세종은 영의정을 탄핵한
사간원 관리들을 견책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짓는다.
4월16일에 우사간 임종선을 좌천시키고 헌납 조자를 파면했던 것이다.
그리고 4월17일에는 세종이 원유관과 강사포 즉 금관조복 차림으로 근정전
에 나아가서 문무과방을 의례대로 발표하는데 문과는 하위지가 장원이 되어
33명이었고 무과는 이원손이 장원이 되어 28명이었다.
하위지는 장원도 보통 장원이 아니라 온 조정을 뒤흔들만큼 명문장을
구사한 장원이었기에 세종이 바로 집현전 부수찬(종 6품)으로 특진 발령한다.
성삼문이 정 9품 정자로부터 집현전 벼슬을 시작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4월25일 의정부에서 이들 과거급제자들에게 은영연을
베풀어 주는데 다음날인 4월26일에 분과장원 집현전 부수찬 하위지와
무과장인 용호위 부사직(종6품) 이원손 등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전문을
올린다.
그 전문을 하위지가 지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음해인 세종 21년(1439)은 하위지가 23세 되는 해인데 이 해 10월25일에
하위지는 병이 심하여 고향 선산으로 내려가 요양하려고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한다.
이에 세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지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 병을 얻어 낫지 않으니 내가 심히 걱정이다.
약과 음식을 내리고 또 벼슬을 더하여 보내려 하는데 어떻겠느냐?"
이에 우승지 조서강 등이 이렇게 아뢰었다.
"상감이 근신을 걱정하고 아끼시는 것은 비록 심히 아름답다 하겠으나
그러나 벼슬을 더하는 것은 실로 근거할 바가 없으니 청컨데 사직장을
돌려주고 그 도 감사로 하여금 연속해서 약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십시오.
만약 온천에서 목욕하고자 한다면 곧 또 감사로 하여금 후하게 공급을 더해
주도록 하는 것이 편할 듯 합니다"
세종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약과 음식을 하사하고 경상감사에게
전지를 내려 하위지를 구원하여 치료하게 한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을 어떻게 애호 양성하였던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토록 신변의 사사로운 일까지도 임금이 세심하게 보살펴 공부에만
점념하게 해 주었으니 집현전에서 인재가 길러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 집현전 학사들은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연마에 몰두하여 사직과 나라를 위해 그들이
익힌 학문이 쓰여지도록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게 된다.
그래서 하위지도 세종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충간을
아끼지 않았으니, 세종 22년(1440) 9월17일에 병이 나아서 부수찬으로
복직하지마자 무례하게 자신의 고집을 세종에게 강청하다가 파직된
전형조참판 고약해(1377-1443)의 파직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간절하게 올린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이 들으니 가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합니다"
"벼락치는 데서 꺽이지 않는 것이 없고 만균(1균은 30근)으로 누르는데
가루로 바스러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임금의 위엄은 자못 벼락 뿐만이
아니고 세력의 무게는 자못 만균 뿐만 아니니, 간하기를 인도하여 구한다
해도 선비는 오히려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벼락으로 겁나게 하고 눌러서 무겁게 하면 비록 요순의 지혜와 맹분
의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꺽이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으면 임금은 그 허물을 들을 수 없어서 사직이 위태하게 됩니다"
대개 신하가 감히 말하는 것은 그 신하의 이익이 아니라 나라의 복입니다.
그런 까닭에 가산의 말이 이와같이 간절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만세토록
임금이 마땅히 유념할 바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보건데 옛부터 누구인들 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즐기지 않는 이가 있었겠습니까마는, 간혹 하루 아침의 노여움을
면하지 못하여 후세에 기롱을 받기에 이른 이도 있었습니다.
이 어찌 그 본심이었겠습니까.
대개 말이 잦으면 듣기가 싫고, 내용이 씁쓸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면 기쁘지 않고,귀에 거슬리면 기쁘지 안으며, 그
싫어하는 것을 건드리면 기쁘지 않습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은데 억지로 그것을 다투니, 스스로 넓고 큰 뜻을 품어
천하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약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려는 지성이 마음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평의 근거가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면 듣는 것을 싫어하는
병이 갑자기 겉으로 나타나게 되니, 이것이 옛날이나 지금 임금의 공통된
병환입니다.
(중략)
신은 속에 의혹이 있습니다.
재신 고약해는 본디 충직하기로 안팎에 소문나 있었고 전하가 이미 그
아름다움을 포상하여 특별히 사용하여 대신의 지위에 두었었으며,
선비들의 여론도 항상 칭찬하며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었습니다.
근자에 언사의 실착으로 집안에 적거하고 있으니 물의에 자못 많이
불쾌하게 여깁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약해가 비록 무죄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대신이 언사로 인해서 폐척된다면 아마 깊은 성덕의 허물이 될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데 성은을 다시 더하여 후회를 남김이 없게
하십시오.
(중략)
신은 일찍이 망령되게 이르기를 "약해의 충은 본심의 충이고 액해의 죄는
실언한 죄인데, 본심의 충으로 비록 그 실언한 지를 속죄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실언한 죄가 또한 어찌 그 본심의 충을 덜 수가 있겠는가.
아마 일시의 일로 가볍게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약해의 사람됨이 고지식하게 간하는 것으로 자임하니 국가 조정 위에
이런 기상을 가 진 사람이 없을수 없습니다.
비록 벼슬을 주어 관직에 있게 함에 남보다 뛰어남이 없다 하여도 그러나
그 충성스럽고 높은 기풍은 조정을 떨쳐 일으켜 바위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로 하여금 조정이 곧은 말로 극간하는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여 기쁘게 모두 와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게 할 터이니 그 백성과
선비의 풍습에 관계되는 바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약해는 대신으로 전하가 무겁게 믿은 바가 오래되었음에서
이겠습니까?
이제 만약 이 죄로 물리쳐서 다시 부르지 않는다면 저 평일에 서로 칭찬
하고 흠모하던 무리들이 반드시 움찔하여 서로 이르기를 "나아가 간하는
길이 또한 어렵지 않은가.
약해는 본디 친신을 받아 천년만에 한 번 만남이라고 스스로 일컬었고
말은 들엊고 게책은 시행되어 알고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마침내
실언한 죄를 입어 끝내 수용되지 않기에 이르니 하물며 그 다른 사람
이겠는가?
어리석게 바로 간하는 풍습은 진실로 본받아서는 않된다.
말해서 득이 되어도 자신에게 이익이 없고 말해서 잘못되면 죄책이
다르는데 왜 애써 감히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다가 만에 하나라도 헤아릴수
없는 위험을 만나 화패를 스스로 취하겠는가"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신하려는 계책은 더욱 긴밀해지고 잘못을 꾸짓는 말은 입밖에
내기를 두려워 하여 꾀로 입다무는 선비가 스스로 그 계책을 팔고, 산림의
소박한 논의는 스스로 나오지 못할 터이니, 그 형세가 어찌 점점 두려워
진다 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식은 속으로 전하를 위하여 그것을 무겁게 생각하니 엎드려 바라건데
다시 성은을 보태십시오"
세종은 이 소청을 윤허하지 않고 다만 하위지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그
충간을 포상한다.
지난 3월18일에 고약해가 지방수령의 재임기간을 6년으로 정한 법이
너무 길어 수령들이 국가재산을 훔쳐 숨기는 죄를 범하기(범장) 쉽고
오래도록 임금을 뵙는 조회에 참여하지 못해 억울해 한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펴며 조회 석상에서 세종에게 무례하게 대들다가 세종에게 호된
구지람을 듣고 파직되었는데,세종은 그의 무레한 언동과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도 도저히 용서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도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고약해의 직언에 세종은 골치 않고
있었으니, 가령 고약해 자신은 강원도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항상
기생을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니면서 창기를 혁파하라고 상소하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이에 세종이 몇번이나 대노하여 그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구짖고,
"성현의 말슴에 "세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자신이 간다"고 하였다.
너는 내가 세번을 듣지 않았는데도 왜 가지도 않고 귀찮게 하느냐?
사심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무안을 주기도 하였었다.
그런데도 다시 직언을 한다고 이치에 맞지 않는 자기 주장을 강요하며
세종의 말허리를 자르고 대들었으니,세종이 아무리 성군이라 한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그 무례를 꾸짖어 파직시켰던 것이다.
오직하면 얼굴이나 성질 날씨 냄사 따위가 괴퍅하고 이상한 것을 "고약해"
라고 표현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언로를 막았다는 누명을 쓰기 쉬우니 고약해를 다시 등용하라는
간곡한 하위지의 상소에도 세종은 한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세종은 다음해에 고약해를 경창부윤으로 복직시켜 성군다운
면모를 다시 한번 과시한다.
고약해는 세종 24년(1442) 8월3일에 개성유수로 임하는데, 몇달 지내지
못하고 다음해인 세종 25년(1443) 1월7일에 67세로 세상을 떠난다.
이러한 과정에 하위지 집안에서는 하위지의 장형인 하강지가 세종 23년
(1441) 7월21일에 전라도 동복 현감(종 6품)이 되어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하강지는 하위지 보다 9년 앞서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하위지가 문명을
떨치며 장원급제하여 바로 집현전 부수찬(종 6퓸)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직급이 아우만 못하게 되고 말았다.
세종이 이 사실을 알았던 듯 하강지를 동복현감으로 내보내며, 운봉현감
장우, 지례현감 김수정과 함께 친히 불러 보고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농상을 권과하는 것은 수령의 급무이나 권과할때 채찍질이 지나치면
도리어 백성에게 해가 미치고 의창의 거두고 나누는 것은 진휼의 선무이나
거주어 들일때 침노하고 독촉함이 지나치면 도리어 원망이 일어나니 너희들
은 마당히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가서 정성껏 하라"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4일자).
결국 영의정 황희까지 사직소를 올리게 하고 세종은 영의정을 탄핵한
사간원 관리들을 견책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짓는다.
4월16일에 우사간 임종선을 좌천시키고 헌납 조자를 파면했던 것이다.
그리고 4월17일에는 세종이 원유관과 강사포 즉 금관조복 차림으로 근정전
에 나아가서 문무과방을 의례대로 발표하는데 문과는 하위지가 장원이 되어
33명이었고 무과는 이원손이 장원이 되어 28명이었다.
하위지는 장원도 보통 장원이 아니라 온 조정을 뒤흔들만큼 명문장을
구사한 장원이었기에 세종이 바로 집현전 부수찬(종 6품)으로 특진 발령한다.
성삼문이 정 9품 정자로부터 집현전 벼슬을 시작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4월25일 의정부에서 이들 과거급제자들에게 은영연을
베풀어 주는데 다음날인 4월26일에 분과장원 집현전 부수찬 하위지와
무과장인 용호위 부사직(종6품) 이원손 등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전문을
올린다.
그 전문을 하위지가 지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음해인 세종 21년(1439)은 하위지가 23세 되는 해인데 이 해 10월25일에
하위지는 병이 심하여 고향 선산으로 내려가 요양하려고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한다.
이에 세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지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 병을 얻어 낫지 않으니 내가 심히 걱정이다.
약과 음식을 내리고 또 벼슬을 더하여 보내려 하는데 어떻겠느냐?"
이에 우승지 조서강 등이 이렇게 아뢰었다.
"상감이 근신을 걱정하고 아끼시는 것은 비록 심히 아름답다 하겠으나
그러나 벼슬을 더하는 것은 실로 근거할 바가 없으니 청컨데 사직장을
돌려주고 그 도 감사로 하여금 연속해서 약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십시오.
만약 온천에서 목욕하고자 한다면 곧 또 감사로 하여금 후하게 공급을 더해
주도록 하는 것이 편할 듯 합니다"
세종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약과 음식을 하사하고 경상감사에게
전지를 내려 하위지를 구원하여 치료하게 한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을 어떻게 애호 양성하였던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토록 신변의 사사로운 일까지도 임금이 세심하게 보살펴 공부에만
점념하게 해 주었으니 집현전에서 인재가 길러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 집현전 학사들은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연마에 몰두하여 사직과 나라를 위해 그들이
익힌 학문이 쓰여지도록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게 된다.
그래서 하위지도 세종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충간을
아끼지 않았으니, 세종 22년(1440) 9월17일에 병이 나아서 부수찬으로
복직하지마자 무례하게 자신의 고집을 세종에게 강청하다가 파직된
전형조참판 고약해(1377-1443)의 파직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간절하게 올린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이 들으니 가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합니다"
"벼락치는 데서 꺽이지 않는 것이 없고 만균(1균은 30근)으로 누르는데
가루로 바스러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임금의 위엄은 자못 벼락 뿐만이
아니고 세력의 무게는 자못 만균 뿐만 아니니, 간하기를 인도하여 구한다
해도 선비는 오히려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벼락으로 겁나게 하고 눌러서 무겁게 하면 비록 요순의 지혜와 맹분
의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꺽이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으면 임금은 그 허물을 들을 수 없어서 사직이 위태하게 됩니다"
대개 신하가 감히 말하는 것은 그 신하의 이익이 아니라 나라의 복입니다.
그런 까닭에 가산의 말이 이와같이 간절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만세토록
임금이 마땅히 유념할 바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보건데 옛부터 누구인들 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즐기지 않는 이가 있었겠습니까마는, 간혹 하루 아침의 노여움을
면하지 못하여 후세에 기롱을 받기에 이른 이도 있었습니다.
이 어찌 그 본심이었겠습니까.
대개 말이 잦으면 듣기가 싫고, 내용이 씁쓸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면 기쁘지 않고,귀에 거슬리면 기쁘지 안으며, 그
싫어하는 것을 건드리면 기쁘지 않습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은데 억지로 그것을 다투니, 스스로 넓고 큰 뜻을 품어
천하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약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려는 지성이 마음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평의 근거가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면 듣는 것을 싫어하는
병이 갑자기 겉으로 나타나게 되니, 이것이 옛날이나 지금 임금의 공통된
병환입니다.
(중략)
신은 속에 의혹이 있습니다.
재신 고약해는 본디 충직하기로 안팎에 소문나 있었고 전하가 이미 그
아름다움을 포상하여 특별히 사용하여 대신의 지위에 두었었으며,
선비들의 여론도 항상 칭찬하며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었습니다.
근자에 언사의 실착으로 집안에 적거하고 있으니 물의에 자못 많이
불쾌하게 여깁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약해가 비록 무죄라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대신이 언사로 인해서 폐척된다면 아마 깊은 성덕의 허물이 될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데 성은을 다시 더하여 후회를 남김이 없게
하십시오.
(중략)
신은 일찍이 망령되게 이르기를 "약해의 충은 본심의 충이고 액해의 죄는
실언한 죄인데, 본심의 충으로 비록 그 실언한 지를 속죄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실언한 죄가 또한 어찌 그 본심의 충을 덜 수가 있겠는가.
아마 일시의 일로 가볍게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약해의 사람됨이 고지식하게 간하는 것으로 자임하니 국가 조정 위에
이런 기상을 가 진 사람이 없을수 없습니다.
비록 벼슬을 주어 관직에 있게 함에 남보다 뛰어남이 없다 하여도 그러나
그 충성스럽고 높은 기풍은 조정을 떨쳐 일으켜 바위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로 하여금 조정이 곧은 말로 극간하는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여 기쁘게 모두 와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게 할 터이니 그 백성과
선비의 풍습에 관계되는 바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약해는 대신으로 전하가 무겁게 믿은 바가 오래되었음에서
이겠습니까?
이제 만약 이 죄로 물리쳐서 다시 부르지 않는다면 저 평일에 서로 칭찬
하고 흠모하던 무리들이 반드시 움찔하여 서로 이르기를 "나아가 간하는
길이 또한 어렵지 않은가.
약해는 본디 친신을 받아 천년만에 한 번 만남이라고 스스로 일컬었고
말은 들엊고 게책은 시행되어 알고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마침내
실언한 죄를 입어 끝내 수용되지 않기에 이르니 하물며 그 다른 사람
이겠는가?
어리석게 바로 간하는 풍습은 진실로 본받아서는 않된다.
말해서 득이 되어도 자신에게 이익이 없고 말해서 잘못되면 죄책이
다르는데 왜 애써 감히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다가 만에 하나라도 헤아릴수
없는 위험을 만나 화패를 스스로 취하겠는가"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신하려는 계책은 더욱 긴밀해지고 잘못을 꾸짓는 말은 입밖에
내기를 두려워 하여 꾀로 입다무는 선비가 스스로 그 계책을 팔고, 산림의
소박한 논의는 스스로 나오지 못할 터이니, 그 형세가 어찌 점점 두려워
진다 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식은 속으로 전하를 위하여 그것을 무겁게 생각하니 엎드려 바라건데
다시 성은을 보태십시오"
세종은 이 소청을 윤허하지 않고 다만 하위지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그
충간을 포상한다.
지난 3월18일에 고약해가 지방수령의 재임기간을 6년으로 정한 법이
너무 길어 수령들이 국가재산을 훔쳐 숨기는 죄를 범하기(범장) 쉽고
오래도록 임금을 뵙는 조회에 참여하지 못해 억울해 한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펴며 조회 석상에서 세종에게 무례하게 대들다가 세종에게 호된
구지람을 듣고 파직되었는데,세종은 그의 무레한 언동과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도 도저히 용서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도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고약해의 직언에 세종은 골치 않고
있었으니, 가령 고약해 자신은 강원도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항상
기생을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니면서 창기를 혁파하라고 상소하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이에 세종이 몇번이나 대노하여 그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구짖고,
"성현의 말슴에 "세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자신이 간다"고 하였다.
너는 내가 세번을 듣지 않았는데도 왜 가지도 않고 귀찮게 하느냐?
사심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무안을 주기도 하였었다.
그런데도 다시 직언을 한다고 이치에 맞지 않는 자기 주장을 강요하며
세종의 말허리를 자르고 대들었으니,세종이 아무리 성군이라 한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그 무례를 꾸짖어 파직시켰던 것이다.
오직하면 얼굴이나 성질 날씨 냄사 따위가 괴퍅하고 이상한 것을 "고약해"
라고 표현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언로를 막았다는 누명을 쓰기 쉬우니 고약해를 다시 등용하라는
간곡한 하위지의 상소에도 세종은 한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세종은 다음해에 고약해를 경창부윤으로 복직시켜 성군다운
면모를 다시 한번 과시한다.
고약해는 세종 24년(1442) 8월3일에 개성유수로 임하는데, 몇달 지내지
못하고 다음해인 세종 25년(1443) 1월7일에 67세로 세상을 떠난다.
이러한 과정에 하위지 집안에서는 하위지의 장형인 하강지가 세종 23년
(1441) 7월21일에 전라도 동복 현감(종 6품)이 되어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하강지는 하위지 보다 9년 앞서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하위지가 문명을
떨치며 장원급제하여 바로 집현전 부수찬(종 6퓸)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직급이 아우만 못하게 되고 말았다.
세종이 이 사실을 알았던 듯 하강지를 동복현감으로 내보내며, 운봉현감
장우, 지례현감 김수정과 함께 친히 불러 보고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농상을 권과하는 것은 수령의 급무이나 권과할때 채찍질이 지나치면
도리어 백성에게 해가 미치고 의창의 거두고 나누는 것은 진휼의 선무이나
거주어 들일때 침노하고 독촉함이 지나치면 도리어 원망이 일어나니 너희들
은 마당히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가서 정성껏 하라"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