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녀와 대화가 아주 잘 통했었다.

그러나 그 외의 문제는 그렇지 못했다.

영신처럼 이질적인 결혼 경험을 한 여자도 드물 것이다.

극단적인 유미주의자이면서도 기본적으로 인간주의적인 영신은 여러
탈선에도 불구하고 종결을 깨끗이 매듭짓는 슬기를 지니고 있는 향기높은
여자였다.

실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그녀는 특별히 남의 시선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명성과 파워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녀의 남자는 오직 지영웅
뿐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편견을 그녀는 거슬러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영신의 영혼은 한없이 자유분방하다.

자기가 져야 된다는 것을 늘 인정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판단은 정당하고 자기의 판단은 언제나 그에 못 미친다는
김치수 신드롬은 아마도 영원히 그녀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치수 회장이 죽기까지는 말이다.

지금 아버지만 아니면 절대로 지영웅과 헤어지지 않는다.

나중에 어떤 기막힌 종말을 맞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영신의 한계는 이것 뿐이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의 룰에 자신을 끼워 맞추어야 한다.

그녀는 사실 지영웅과 떨어져 있을때 그를 더 사랑한다.

그 사랑은 맹목적이다.

갈길을 정해 놓고도 그렇게 지영웅을 사랑한다.

그것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랑의 본능적인 불꽃이다.

지금 아버지의 소원대로 세번째 결혼을 포장좋게 치르게 위해 천신만고
하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서 타고 있는 지영웅에 대한 본능적이고 무모한
사랑은 견디기 힘든 불꽃으로 타고 있다.

그것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김치수는 어느 때보다도 영신이 두렵다.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는 지영웅이야말로 김치수가
요즘들어 가장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정보원을 고용해 그의 현주소를 염탐시키고 있다.

정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다.

"야, 이 요망한 것아"

"네, 아버지"

그녀는 맑고 푸른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미소한다.

"윤효상 요녀석,제대로 산대냐? 옛날 마누라에게 가끔 전화하는 걸 보면
요새 남자들은 우리 시대와는 영 틀려. 마치 너희는 친한 친구로 남은
사이 같구나"

"맞아요.

우리는 헤어졌어도 늘 대화할 수 있는 우정을 쌓은것 같아요.

대화 하나는 아주 잘 된 부부였으니까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요새 사람들은 나에게는 너무 어려워. 우리같으면 간통한 마누라는
입에도 안 올릴텐데. 하하하하"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7일자).